2010. 12. 29. 14:16

사라진숲 - 지식e채널

사라진 숲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지구촌'이란 말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허상인지를 보여줍니다

 

지구촌이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 있는 소수 부족의 삶과는 아무 상관 없이

단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세계의 산물이며, 인류의 물질적 행복 추구라는 구실로

자행되는 백인들의 개발이 결국은 인류의 생존을 위험하고 있습니다

 

 

   

                   [ 아마존 우림의 의미 ]

 

아마존강 유역의 전체 면적은 약 600만㎢로 남아메리카에 있는 9개 국가에

걸쳐 있다. 브라질에 속하는 아마존 유역은 약 414만㎢. 브라질 전체 영토의

약 48%를 차지한다.

 

아마존 강의 개발은 브라질이나 아마존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들만의 문제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 우림은 남미 국가들의 영토인

동시에 세계 산소의 60% 이상을 공급하는 주요 삼림 자원이고,

세계 50%이상의 곤충과 동물종들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자,

아직까지 원주민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80%이상의 인류의 식단이 이곳에서 비롯되었고 3,000종 이상의 과일이

자라고 있으며, 아직 조사되지 않은 수많은 치료용 식물들의 보고이며,

지구기후시스템의 기둥이다.

 

결국 아마존 강 유역의 개발로 인한 삼림 파괴는 전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일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 아마존 우림의 파괴 ]

 

“불법으로 베어낸 경질 목재는 실어내기만 하면 돈이 됩니다.

당연히 여기서 수익이 생기겠죠. 그 돈으로 더 넓은 우림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내고 훼손하는데, 이때 소를 방목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를 4~5년 정도 풀어놓고 나면 우림이 대충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을 지르는 거죠. 방화는 농작물을 심기 위한

마지막 ‘청소’ 과정입니다.”

 

 

브라질이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 이후 2000년에 이르는 동안에만

한국 면적의 약 8배인 78만㎢의 아마존 밀림이 사라졌다.

 

1500년경 포르투갈인들이 도착하며 시작된 아마존 우림의 파괴는 1970면

군사정권이 토칸신주에 2000km의 길을 건설하며 가속화되었고 1980년대에는

국가 빚을 갚는 자원으로 활용되며 IMF, WB에 의해 많은 파괴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정부가 회사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벌목과 광산 활동을

장려한 것이다

 

진보 세력인 룰라 정권이 개발과 보존의 조화를 내세우며 환경법을 강화하고,

2002년 환경인들의 박수를 받으며 오랫동안 아마존 보호운동을 벌여온

마리나 다 실바가 환경장관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다소의 기대는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별반 나아진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정부의 기본 계획은 Advanced Brazil를 위하여 1999년 코르도소 정권이

시작한 정책을 유지하는 수준이었고 2007년까지의 기반시설 계획에는 8

000km도로 포장, 항구, 공항 건설, 가스파이프 라인 2개 추가건설,

열병합 발전소 3개 추가건설, 거대 투쿠루이 수력발전건설, 철도건설,

수천키로 전력라인 연장등이 포함되어 있다.

 

도로 건설만으로도 20년 이내 도로 50km 반경 30-50%의 식물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정부측에서는 6-70년대의 도로건설과는 다른

환경보존과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2000년에는 550,000㎢ 프랑스만한 크기인 14%의 브라질

아마존 열대우림이 파괴되었고, 2003년은 1995년 이후 최대 파괴가

이루어진 해로 기억되고 있는 상황이다.

 

 

 

 

 

 

                          [ 야노마미 부족 ]

 

‘당신들 백인들은 당신들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도 당신들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직 병과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최근 열대 우림 지역 일부를 매입하거나 바이오 연료들을

심는 방법을 행하려 하지만 이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열대 우림은 매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가 항상 보존해 온 것입니다.

 

이 숲이 없다면 오직 질병만이 존재할 것이며,

우리가 없다면 이 숲은 죽은 땅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말에 당신들이 귀 기울일 때가 왔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땅과 건강을 돌려주십시오.’

야노마비 부족장 다비

 

 

 

 

브라질과 미국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마존 유역의 개발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브라질 아마존 강 유역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인디언들의 땅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족들의 땅은 여전히

보호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특히 개발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 원주민이다.

 

1950년 처음 외부인과 접촉한 야노마미 부족은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많은 부족민을 잃었다.

 

사람이 죽으면 나무위에 말려서 재로 태워 바나나와 섞어 먹으면

영혼을 보존하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풍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기 조사자들은 폭력적이라는 기록을 하기도 하였다

평화로운 야노마미 부족은 1970년 BR 210 고속도로가 뚫리고,

1980년 중반 골드러쉬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20%가 죽고 70%의

땅을 빼앗긴다.

 

이후 국제적 압력으로 1991년 베네주엘라에 인디안 보존 지역이 생기고

브라질 최대 96,650 ㎢의 인디언 지역이 형성되었지만 1993년 16명의 주민이

금광업자들에게 살해되는 등, 아직도 아마존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

변호사도 없고 땅소유 문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안전은

개발로부터 심각히 위협받고 있다.

 

 

 

                [ 살해 위협속의 아마존 환경운동가들 ]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 밀림 속에서 아무런 보호 없이 살고 있는

농민들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겐 환경을 존중하면서 명예롭게 일하며 살아가는 터전인 이곳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신성불가침한 권리가 있다.” - 도로시 스탱

 

처음에는 고무나무를 위해, 밀림을 위해 싸웠지만

지금은 인간성을 위해 싸운다" -치코 멘더스

 

길이 그냥 길이 아니듯이 삶도 그냥 삶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는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치코 멘데스도, 도로시 스탱도 살해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살려면

살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서 도망치기보다 죽더라도 자신의 길을 지키길

원했습니다. 무엇이 삶의 길인지에 대해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영화 ‘불타는 계절’(존 프란켄하이머 감독·1994년)로 알려진 ‘아마존 열대우림의

영웅’ 치코 멘데스(1944~88)이다.

 

 

                            

 

그는 아마존의 농부에서 환경운동가로 변신하여 고무 채취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숲 사람들을 위한 아마존 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살림파괴

주범과 희생자 규명 활동을 벌였다. 당연히 개발 이익을 쫓는 대기업과

대규모 농장주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여러번의 암살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1988년 12월 자택 뒤뜰로 뛰어든 괴한의 총탄을 맞고

44세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사건은 아마존 파괴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피살 이후에도 아마존에서 지난 20년간 토지분쟁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1,237건이나 발생하였고 최근 2005년 12월에도 아마존 환경을 위해

일하던 미국 출신의 도로시 스탱 수녀가 피살되었다.

 

도로시 수녀의 얼굴에 날아든 총알은 그녀가 읽던 성서를 손에서 떨어뜨렸고

수녀복을 피로 적셨다.

 

                                        

 

습격 두 달 전 브라질 인권상을 받는 자리에서 도로시 수녀는 정부 차원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부패 권력과 결탁한 정부로부터 무시당하였다.

 

룰라 대통령은 하위 20%의 인구가 단 2%의 부를 소유한 현실을 바꾸겠다고

공언했으나 경제적 압박이 심각한 상황에서 정치적 호언은 말잔치에

그칠 뿐이라, 도로시 수녀의 희생 뒤에도 함께 활동하던 주민 다섯 명이

더 살해됐고 이들과 함께 아마존도 죽어나간다.

 

지금도 가톨릭 주교를 포함해 환경운동가 260명이 벌목기업가들과

거대 농장주들의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

 

실제 지난 2월에는 땅 없는 농민들을 위한 토지분배운동을 벌여왔던

프란시스코 다 실바라는 운동가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러나 숲을 보호하려는 이들의 목숨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마존 파괴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가디언은 개발에 파괴된 아마존 삼림이 지난해 9월 이래 1년 동안 64%나

늘었다고 보도했다.

 

 

 

 

 


 

 

2010. 12. 29. 11:23

진로학교 소감문 당선(?) ㅎㅎ 기뻐요.-사교육걱정없는세상



진로학교 첫번째 소감문을 씁니다. 6강까지 수강하는 내내 저는 마음을 두드리는 새로운 질문들을 자녀에게 적용하기보다 제 자신에게 계속 묻고 자서전을 읽는 심정으로 제 삶의 여정에 끝나지 않는 요구들을 담담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제 들은 6강을 시작으로 소감문을 정리하면서 귀한 강의들을 제 속에 잘 내면화하고 삶의 관점과 행동반경에 발전적 변화가 있길 바랍니다.

임영신님을 본 첫 느낌은(생방) 가수 권진원님과 닮은, 선이 가늘고 여성적인 미모에 독특한 강한 흡인력과  보이는게 다가 아닌... 매력을 느끼며 인생은 진정 불공평한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었습니다. ㅎㅎ

저런 외모와 분위기에다 공정여행가라는 남다른 풍성한 인생여정의 전문 이력이... 듣고 보니 저와 나이도 같은게 아닌가요 애도 셋이고 남편도 훌륭하시고... 강의가 진행되면서 약간 질투와 시기심이 불쑥 들어설 뻔 한 저의 부끄러운 반응에 스스로 놀라면서 지난 20대를 떠올리고 30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인생이 여행이고 나의 정체성은 "나그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 40이 넘도록 해외여행은 한번도 못해 보았습니다. 국내여행도 새로운 만남을 전제로 하는 여행은 다섯 손가락에 들고 관광 역시 몇 차례일 뿐입니다.

20대 때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여러 번이었지만 부모님께서 너무나 완강히 반대하시고 제 인생 전체에 대한 걱정으로 여기셔서(제가 일단 떠나면 메니아가 될까봐^^;;) 그 비밀한 걱정이 저도 부담되어 뛰쳐 나가진 못했습니다. 졸업후에는 현장에서 진로를 찾으라고 해외에 보내시려고 까지 했지만 제 모험심은 다시 안정감에 묶여서 여행은 제 인생과 넘 먼 얘기가 되어버렸지요.

결혼 후에도 기회는 있었지만 여행의 초대에 계속 사양거절...(애셋이라는 부담...물론 재정도)ㅎㅎ 작년에는 여행가 경력이 있는 후배가 애셋두고 함께 주부휴가 다녀오자고 했지만 간이 콩알만해진 저로서는 아이들을 누군가 맡아준다면 모를까 절대 불가라고 오히려 설득했지요. 남편은 뒷걱정말고 다녀오라지만 ㅎㅎ 친정부모님과 애들 고생시킬 생각에 엄두가 안 나더군요.

일상이 흔들리는 것이 긴장되고 모험을 저지른 후 뒷수습할 힘겨움이 걱정되고 미리 채워버리는 뒤죽박죽 그림은 소심함을 더 강화시키곤 했습니다. 도전이라는 것과 원래 안 친했지만 도전은 남편 것, 애들이 새도전을 원하면 지지해주는 것 정도로 내 몫은 후방노릇하는거 잘 하자~였지요.

시민운동활동가로서 열심히 9년을 살아왔고 인생의 전환점에서 삶의 본질을 흔드는 질문에 직면하고 용기있는 선택을 한 임영신강사님의 10여년의 여행 여정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선물은 하나님 앞에 손을 내미는 자가 받고 풀어 볼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한비야씨의 강의를 들었으면 책보다야 간단하게 재미났을지 모르지만(그분은 멋있는 사람이지만 전 그분의 책을 열지는 않았을 겁니다.) 임영신님의 당당함과 수려한 말솜씨가 좀 거부감이 들더라도 ^^:; 갠적으로 같이 울고 웃고 평화의 희망을 꿈꿀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 삶의 겸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나눔의 근거는 자신의 탁월한 실력이나 주도면밀한 계획-사업성-능력이나오랜 꿈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장기에 꿈이 없었다는 약한자의 음울한 배경이나 30에 이르도록 해외여행을 못해 보고 아시아에 문외한이었다는 경험과 재정적 지원이 가시적이지 않은 조건이나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진 홀가분한 여행전문가가 아닌 세 아이의 엄마이고 단지 가족들이 걱정어린 지지를 해주고 있다는 현실이 생명력 있는 나눔이었습니다.

주변에 보면 20대에 평화운동을 하러 방학동안에 떠나는 청년들, 30대에 시간과 재정을 감수하고 심플하게 떠났다 오는 싱글들을 보면  격려를 하는 입장이지만 제 현실은 때때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에 씁쓸한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이 그런 선배의 경험을 따라 가면 좋겠다 막연한 기대를 했었는데 임영신님의 30이 넘어서 모험으로 떠난 인생을 듣자니 지금 이미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그 평화의 꿈이 더욱 실감나고여행이라는 것이 오감이 즐거운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빚어질 때 삶의 한 부분으로 엮어진다는 사실이 내 얘기처럼 설레이고 좋았습니다. 

책이나 전해들은 얘기로 평화여행을 알았다면 또하나의 좋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을 텐데 강사님께 직접 들으니 우리나라가 정말 경제적으로나 사회의식이 많이 성숙해졌구나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희망을 꿈꾸기에 좀더 열렸구나 감사한 맘이 들었습니다.          

전 20대에는 아프리카와 아랍을 포함한 아시아권과 동유럽, 중앙아시아에 대해 관심을갖기 시작했었고 분쟁지역이거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 대해 걱정하는 맘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북한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계속 관심을 두고는 있었지만 맘 뿐이었고 mbc에서 한밤중에 방영하는 <W>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고 사회적으로 빚진자의 정체를 잊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W라는 알파벳은 weak(약자), woman(여성) 등 주로 세상(world)의 억압받는 사람들을 주제로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잠시나마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 악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에 종영한 것에 대해 넘 미안하고 서명운동이라도 해서 살렸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생각에 머물고 끝나 버렸습니다.

임영신님의 강의를 들으며 한 시민운동가가 "평화공정운동가"라는 정체성을 갖은 것이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얼마나 현세상이 요구하는 절박한 일인가 가슴 절절했고 뭐든지 20년 앞서는 일본이 "PEACEBOAT"를 운항하는 것이 얼마나 발전하고 성숙한 면모인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전 성장기를 나름 감성적이고 자유롭게 지냈고 사회적으로 연약했습니다. 근거없는 낙천주의자였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몸이 고단한 것은 겁내고 가슴과 머리의 활동만 좋아했습니다. 대학까지 줄곧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니 사실 매우 게으르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도전해 볼 용기도 없었습니다. 몸도 둔하고 불편에 예민하고 모험에 따르는 걸림돌에 늘 주저 앉은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을 생각할 때 미안하지만 저보다 훌륭하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면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경험을 많이 해서 사소한 불편이나 불안요소에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며 생각하는 방향이나 방법이 넓고 명분이 있고 늘 겸허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늘 관계지향적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맘이 깊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이런 바람들은 제가 사는 인생여정을 나그네처럼 살아야한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이룰 것을 다 가져야 한다는 야망이 있다면 지금 저의 삶은 참 더없이 지치고 허망할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이 땅의 깨어짐을 잊지 않고 가난과 질병과 억압의 분쟁 속에서 희망를 꿈꾸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라일락님 가족사진입니다. ^^ )

그것을 위해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뿐 아니라 삼형제와도 지속적으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지구촌의 빚진자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며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 가는 삶에 대한 관심이 흘러가게 해야겠습니다. 엄청난 양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듣고 강사와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열혈자원봉사자 무급 상근자anny님 말고는 그렇게 오타 없이 스페이스바 없이 좔좔좔 (초)속달변이신 분은 처음이다 감탄했습니다.^^;;

연약한 몸짓으로 평화를 일구는 임영신님의 개척하신 좁은 길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열심히 다고진 걸음으로 한걸음한걸음 내딛는 평화를 위한 공정여행에 우리 사회가 동참하며 국가적 체질도 더욱 건강해지고 OECD국가의 정체성이 선하게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2010. 12. 27. 11:16

공정여행가 임영신 진로학교 6강

 


12월 9일, 이제 진로학교 강의는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강의에 임하시는 강사분들의 열정과 수강생들의 진지한 태도, 고민은 변함없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주 강의는 많은 분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임영신 공정여행가께서 해주셨다. ‘공정여행’ 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는 조금은 낯선 말이었지만 그의 강의를 들은 후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좋은 여행, 나아가 성숙한 여행에 대한 관심과 소망이 생겼음을 확신한다.

먼저 공정여행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 본다면, 기존의 여행이 가진 한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봤을 때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가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로 동남아시아의 멋진 휴양지와 리조트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곳에서 소비하는 돈이 주로 그 지역주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역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매우 낮은 대우를 받으며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 단순노무자가 되는 것이다. 그 돈은 그 곳을 개발한 다국적 기업에게 대부분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악순환과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공정여행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의 주된 가치는 “지역에 도움이 되는 여행, 단순한 소비가 아닌 관계 맺는 여행”으로 현지인들의 인권과 생명, 곧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그 속에 어울리는 여행을 추구하는 것이다. 임영신 여행가는 2003년 이라크 평화여행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에 나섰으며, 지금은 이매진피스라는 단체에서 많은 이들의 여행 또는 삶을 멘토링하며 아름다운 발걸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진로학교 강사분들이 모두 그랬듯이 임영신 여행가님도 지금의 삶이 있기까지는 몇몇의 계기와 성장과정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17살 때의 일이다. 여행가님의 유년시절은 결코 밝지 않았다. 어두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매우 내성적이고 조금은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은 책 읽기와 일기쓰기였다. 그러던 중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그 곳에서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주고 존귀하게 대해주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여행가님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면 남을 도우며, 보다 가치 있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단순히 청소년기의 친구들을 돕는 일을 꿈꾸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또 사회를 돌아보면서 한국근현대사, 교회사를 알게 되고, 지금까지 보아왔던 세상과 다른 모습들, 부정의한 모습들을 접하면서 사회에 대한 분노, 정의와 윤리에 대한 가치와 열망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책임을 실천하는 교회에 다니면서 영향을 받고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명확했던 것은 이 사회의 바닥에서 남을 돕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때마침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에 우연히 보게 된 기독신문을 통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에 지원을 하여 간사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여행가님은 시민운동을 재미있게 배웠고, 일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근무하던 단체의 총무님을 통해서 그저 직장의 상사가 아닌 인격적이고 따뜻한 멘토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여행가님의 삶에도 하나의 소중한 가치와 목표가 되었다.


첫 시민단체인 기윤실 이후 녹색연합,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등을 거치며 약 10년 가까이 계속해서 시민운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단순히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닌 각각의 운동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 자연과 생태, 재활용, 여성문제, 인권문제 등 - 본인의 삶에서 통합적으로 융화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던 여행가님의 삶에 드디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0년 처음 갔었던 일본 여행이었다. 바로 기윤실 간사로 활동할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위안부 할머니 사건의 전범재판이 열리는 현장으로, 깨어 있는 지식인들과 역사가들이 그 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일본 할머니들 뿐 아니라, 캄보디아, 필리핀, 중국, 대만에서 오신 할머니들께서 같은 아픔을 나누는 것을 보고, 여행가님은 이 문제가 단순히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아시아의 문제이고 아시아 전체의 아픔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론으로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 여행이 여행가님의 삶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계기였다.

이후 대학원에 가면서 평화와 아시아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으며 이후 두 번째로 가게 된 여행이 2003년 이라크 평화여행이었다. 여행가님에게는 얼마나 많은 나라를 여행했는지 보다는 얼마나 깊은 여행을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가 여행지에 다다를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이라크 현장에서 보고 겪으신 일들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 정도로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깊게 소통하는 법, 내가 원하는 대답을 우선하기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 어디를 가는가보다 그 여행지에서 누굴 만나고 누구와 함께하는가의 중요함 등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방을 100%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게 된 시간이었다. 이라크에서 처음 만난 가이드 분이 건넨 “샬롬” 이라는 인사와, 어쩔 수 없이 위험한 땅을 떠나야하는 여행가님을 향해 “기억할게요!” 라는 인사말을 남긴 아이들까지 모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여행은 나를 바꾸고, 성숙한 여행은 세상을 바꾼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는 상태에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인 이라크로 평화여행을 다녀온 그 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던 여행이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느꼈다. 특히, 아이들의 진로를 고민하기 전에 우리들의 지나온 걸음을 돌아보고 앞길을 고민하게 되는 기회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려하고 청산유수 같은 이야기로 긴 시간을 풍성하게 채워준 여행가님은 역설적으로 아직도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다만 자기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는 명확하다고 하셨다. 삶의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우리아이들의 진로 역시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지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여행을 그저 관광지에서 구경하고 소비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새롭고 따뜻한 울림을 주는 귀한 시간에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여행가님은 일본의 피스보트를 소개해 주셨다. 1년 동안 배를 타고 다니며 세계를 여행하고 또 배 안에서는 1년 365일 새로운 만남과 배움의 장이 열린다. 그 배의 일정을 계획하고 조율하는 일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모두 맡아서 하고 있다. 그 긴 항해를 통해 또 하나의 착한여행, 즉 공정여행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공정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여행을 어디로 가는 것보다 어떻게 가는 것을 더욱 고민하면서 말이다.




2010. 12. 20. 20:43

마더테레사의 편지-내적 고통, 그 큰 ‘어둠’ ‘외로움’ ‘고통’을 넘는 인생

  • 의무감에서 벗어나
    가끔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가졌더라면 덜 고통스러웠을텐데
    그 영혼이 참 솔직했군요.
  • 완고한 주인에게 스트라이크를 벌이다니 ^^

  • 댓글 감사해요^^
    의무감이라는게 사람에 따라
    그리고 척박한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게 드러나겠지요?
    그분의 생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그래도 자신의(모든 인간) 한계에 솔직할 수 있었던 게 은혜라고 생각해요.
    그 영혼이 그렇게 스트라이크를 하지 못하셨다면 천국의 소망도 불가능했겠지요.
  • 그 인생에 고독과 어둠이 넘 무겁고 영원 같이 느껴질 때 절망으로 도망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더욱 구한 그 자세가 그분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신앙이 있고 제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왜 더 성장할 수 있는데 주춤할까 이 시행착오를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니
    넘 괴롭다 하며 저의 무력감에 통탄해 하지요 ㅜㅜ
  • 사실 그 무력감은 인간의 본질이고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때마다 한번씩 주저앉았다 일어나는게 저의 일상입니다^^:;
  •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

  • 아이들 진로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한계 그리고 헌신의 현실적 모습...
    뭐 그런거 얘기하다가 아이들과 이 주제를 나누었어요.



    테레사 수녀도 ‘신의 존재’ 고뇌
  • “내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미공개 편지서 밝혀져
    “내 영혼은 지옥의 고통 한때 천국도 확신못해”
    타임誌 ‘커버스토리’로
    • ▲ 테레사 수녀
    •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Teresa·1910~1997년) 수녀가 50년간 신앙의 위기를 겪었으며, 한때는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는 내용의 책이 나온다.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2003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 러나 미 시사주간지 타임(Time) 최신호(9월 3일자)는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 : Come Be My Light)’라는 새 책을 인용해,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며 “그는 자신이 겪은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했고, 한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책의 저자는 테레사 수녀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회’ 소속 고위 성직자이자, 그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브라이언 콜로디에추크(Kolodiejchuk) 신부.

      테레사 수녀는 1979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 러나 석 달 전인 그해 9월,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마이클 반 데르 피트(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다”고 썼다.

      이 책은 테레사 신부가 여러 명의 고해 신부들에게 보낸 40여 장의 미공개 서한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녀가 폐기되기를 원했던 이 편지들에는 ‘어둠’ ‘외로움’ ‘고통’이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1953 년 퍼디낸드 페리에(P?rier)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선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1959년 8월 로런스 피카키(Picachy) 신부에겐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적었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무신론에 관한 책들을 쓴 크리스토퍼 히첸스(Hitchens)는 “테레사 수녀 역시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깨달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 러나 저자인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기도했다”며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 출처> http://cafe.daum.net/ssaumjil/LnOm/564713

     
     


    책소개>
    마더 데레사의 서거 10년을 맞아, 출판된 적이 없는 그녀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마더 데레사가 빈곤과 가난에도 흔들림 없이 절대적 빈곤에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었지만,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로워했음을 보여준다.

    1장과 2장은 '부르심 안의 또 다른 부르심'을 받기 전에 마더 데레사의 내적 삶을 보여준다. 3장부터 7장까지는 1946년 9월 10일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우라는 계시를 받은 일과 새로운 사명을 시작하기 위해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일어난 극적인 일들,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빈민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장부터 13장까지는 새로운 부르심과 사명을 실천하는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이 책은 마더 데레사의 친밀한 초상화이다. 마더 데레사를 알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더 데레사가 어떻게 선교사업 시작했으며,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왜 늘 그녀가 기뻐했는지, 또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의 간청에 대한 그녀의 응답이기도 하다..
    2010. 12. 20. 20:15

    마더테레사의 삶이 인류에 드러내는 인문학적 가치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텅 빈 곳으로만 보입니다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느님께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마더 데레사-

     

    저글이 진짜 테레사님이 신의 부재의 마음을 담았는지 부터 한번 살펴보시죠...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어느누가 보아도 한 평생 다른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시며 키워 온 사랑이 그 누구 보다 크지만

    겸손히 그는 작다고 표현 했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앙이 있었음에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을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셨지만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저게 테레사님의 모습이였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면 그분의 미소를 그리워 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허상을 알고 있었다면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히 부탁할까요???

     차분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테레사님의 저 마음의 표현의 무엇인지 명상해 보신다면 왜 저런 일기가 나올지 이해가 되시리라 봅니다.^ ^*

     

    저 일기를 쓰고 난 3년뒤 그는 노벨상을 받으러 나간 자리에 하나님께 감사함을 돌립니다.

    저는 그분이 노벨상을 받기 3년전에 신의 부재를 느끼다 3년후에 다시 하나님을 느꼈다고 보지 않습니다

    출처> 미디어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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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의 위대함

    우리는 위대한 성직자라고 하면 평생 어떤 마음의 고통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절대 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의문’ 자체가 금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김수환 추기경을, 고민하는 성직자라는 의미에서 ‘햄릿형’이라고 하지만 추기경은 어떤 특별한 활동이나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존경받기보다, 하루하루 일상적인 삶 속에 주어지는 평범한 일과 기회를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대함으로써 성인(聖人)이 된 분이다.

    그가 남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은 종교적 삶이란 게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사랑스럽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빛나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추기경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수행했다. 그가 걸어간 길은 특별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따를 수 있고 또 따라가야만 할 보편적인 길이었다.

    인위적인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마치 어머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신 앞에 놓아버린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이 시대 가장 극적인 인문학적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가톨릭 성녀 마더 테레사의 삶이 궁금해졌다. 일생을 외국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바치고 선종한 마더 테레사는 겉으로는 한 오라기 의심도 갖지 않는 초인적 힘으로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었지만, 그의 내면 역시 어둠과 고독으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다만 남을 위해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온 존재를 흔들어대는 고뇌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정한 철녀’ 테레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곤히야 아녜스 즈약스히야다. 편의상 세례명을 쓰기로 한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26일 지중해 연안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알바니아계인 양친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상인으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깊은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 미사는 물론 매일 아침 자녀를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 나가 미사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테레사의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은 가정환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회고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잘 알고 있었다. 식탁에는 거의 매일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수다를 떠는 데 전기를 써서는 안 된다’며 전깃불을 끄고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먹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옷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에 불행이 닥쳐온 것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다. 테레사가 9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조국 알바니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피를 토하며 돌아왔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의사들은 ‘독살’이라고 했다.

    남겨진 것은 달랑 집 한 채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업하던 사람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서 자수 제품을 팔았다. 성실한 어머니 덕분에 가게는 알토란처럼 커갔다. 역경에 처해도 좌절하지 않는 어머니 모습은 어린 테레사에게 큰 가르침이 됐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테레사의 어머니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열두 살 되던 해 테레사는 성직자의 꿈을 갖게 한 결정적 인연을 만난다. 다니던 성당에 주임교수로 부임한 얌브렌코비치 신부였다. 신부는 성당에 도서관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고전문학작품을 읽혔는데 테레사는 책읽기에 너무 열중해 어머니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신부는 또 전 세계 선교사들의 활동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 벵골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활동이 테레사를 사로잡았다.

    테레사는 태어나서 처음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특히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크면 자신도 선교사가 되어 인도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다.

    테레사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수녀회에서 수녀들을 모집해 인도 각지로 보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테레사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그분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거라. 네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다르질링과 캘커타

    어머니의 이 말은 평생 테레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침반이 됐다.

    그녀는 예전 수녀들이 그랬듯 오랜 배 여행 끝에 인도 히말라야 산기슭 다르질링이란 곳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은 부자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할 만큼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본명 아녜스를 버리고 테레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의 성녀 테레지아에서 따온 것이다. 수련기간이 끝나고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있는 로레타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과 캘커타는 너무 달랐다. 수녀원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수녀원은 캘커타에서도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에 있었고, 슬럼가와 공장, 유동인구가 많은 철도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코앞에 있는 쓰레기장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바람이 불면 악취가 수도원으로 흘러들어왔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17년이나 일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가운데에 아쉬움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질병이 그칠 날이 없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수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수녀원 규칙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조용하고 청결한 방에서 창으로 슬럼가를 내다보며 ‘내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좋은가?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버려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출가할 때 다짐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이 먼 나라까지 온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들,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 손발 없는 아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 병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어떤 때는 도와달라는 환청이 들렸다.

     
    *수녀원을 떠나 거리로

    하지만 수녀원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든 곳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환속이라면 개인의 결정에 달렸지만, 수녀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 개별 활동을 하고 싶어 했기에 교회 내부에서 그것을 받아줄 리 없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를 받은 대주교는 예상대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캘커타는 정치적 종교적 대립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수녀가 혼자 거리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끈질겼다. 무려 2년여 기다림 끝에 마침내 교황으로부터 ‘1년에 한해 수도원 외 임시거주 허가’를 얻어냈다. 말이 2년이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2년 동안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테레사 수녀의 마음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 평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수녀원을 떠나 푸른 물색 줄이 그려진 하얀 사리(인도인들의 평상복) 세 벌과 작은 십자가, 묵주 하나를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빈민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선 캘커타에서 열차로 10시간가량 떨어진 갠지스 강가 파트나에 있는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호하는 법, 주사 놓는 법, 의약품 취급하는 법, 치료나 수술을 돕는 법, 응급처치, 출산을 돕는 법 등 기본 의료교육을 받았다. 외국인 국적으로는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적까지 인도로 바꿨다. 넉 달 간 수련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1948년 12월초 캘커타로 돌아왔다.

    지금과 달리 60여 년 전 캘커타는 슬럼 그 자체였다. 마을 한가운데 저수지는 큰 웅덩이 수준이었는데 주민들은 그 물을 마시고 거기서 빨래도 했다.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악취를 풍겼다. 진료소도 약국도 학교도 없었다.

    수녀는 일단 이 마을의 어른들부터 만났다. 학교를 열겠으니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웅덩이 근처 나무 아래에 학교를 열고, 주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쓰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노상교실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보였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불타는 듯한 태양 볕 아래서 허름한 면 사리를 걸친 외국인 수녀가 슬럼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장소를 제공하겠다거나 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 수녀원 학교에서 수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한두 명 찾아와 수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장소가 마련되고 협력자들도 생기자 제법 학교 모양새가 나기 시작했다. 수녀가 제일 신경 쓴 것은 청결이었다. 아이들에게 몸 씻는 것부터 가르쳤다. 몸을 씻고 온 어린이에게는 상으로 소금을 주었다. 여자애들에게는 재봉도 가르쳤다. 아이들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쁜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면 곧바로 고쳤다.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와 약국도 열고 싶었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교회’ 탄생

    1950년 10월7일 단 열두 명의 수녀밖에 없던 테레사 수녀그룹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해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사랑의 선교회’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서원으로 두었다.

    남을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돕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수녀회가 사랑의 선교회 수녀 자격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 그밖에 ‘성격이 명랑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굳센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의 강조였다.

    수녀는 또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교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선교회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도 내부에서의 반대와 오해였다. 가장 큰 오해는 테레사 수녀가 힌두교 중심지에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러운 사람들로 더럽힌다는 항의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데모가 숱하게 일어났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우리를 죽이면 하느님 계신 곳에 더 빨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힌두교도들의 반발은 두 가지 사건으로 잠잠해졌다. 불만을 접수하고 선교회에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수녀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몸을 씻기고 간호해주는 것을 본 경찰은 오히려 성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외국인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주장대로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와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 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게 하라.”

    한번은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이 결핵 말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그가 몸을 누인 곳은 사랑의 선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아와 테레사 수녀에게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30년간 사원에서 신에게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제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신 신께 경배하게 된 것은 저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이웃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선교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마더 테레사가 전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와 보니 남자는 이미 숨이 끊겼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외롭게 죽어간 사람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듯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수녀가 죽어 쓰러진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간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도도 3세기 반에 걸친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캘커타가 있는 서벵골에서는 분쟁이 유독 격렬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에 따른 인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47년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갈라졌다. 동 파키스탄은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로 완전 독립한다. 이때 인도가 방글라데시 편을 드는 바람에 서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늘 그렇듯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이었다. 목숨만 겨우 건진 사람들은 대도시 캘커타로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넘쳐나는 캘커타에 난민이 몰려들자 캘커타는 빈민소굴이 됐다. 공터뿐 아니라 공원, 도로까지 판잣집으로 메워졌다. 1971년 시청 발표에 따르면 캘커타 전체 인구 1000만 중 노숙자가 40만이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심지어 아이도 길에서 낳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흔했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상상이 간다. 어느 날은 길에서 쥐와 개미에게 반쯤 먹혀버린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시궁창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데려와 돌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니 천사가 되어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3시간 후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수녀는 사람이 홀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씨앗이 되어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인도인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은 단지 물질이나 간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그들 각자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선교회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은 이들은 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중요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다고 말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구더기가 이 여인의 몸을 파먹고 있었다. 여인을 침대에 눕히자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테레사는 “일찍이 사람 얼굴에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여인은 “감사해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지만 테레사 수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만일 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추워요, 배고파요 하면서 어서 나에게 먹을 것과 옷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여인은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사랑을 주고 갔다.’

    사랑의 선교회 활동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됐다. 테레사 수녀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시설을 만들고 수녀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 런던 멜버른 등 선진국 대도시에는 육신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멜버른 시내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창문은 닫혀 있었고 실내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서 불을 켜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수녀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겠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란 현대사회의 섬처럼 분리된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1979년 12월11일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모든 곳에 캘커타가 있다’고 한 그녀의 연설은 나눔철학의 정점을 보여줬다. 마더 테레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면 누구나 ‘사랑의 선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의 고뇌

    그녀의 일생은 믿음과 복종,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불굴의 소망으로 점철된 삶이다. 하루 중 1분 1초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 그녀는 기쁨으로 충만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겼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께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에너지는 침묵과 묵상이라는 내적 수행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내적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선교회 사업을 시작하고 3년 뒤인 1953년 3월 대주교에게 보낸 고해성사 편지에는 이런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제 안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사업’(선교회)을 시작한 즈음부터 계속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마더 테레사는 몇 해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아주 가끔 모호하게 드러냈다. 그러다 마침내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1년 뒤 테레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으로 가득했다. 아마 이런 심적 상태는 선교회라는 조직을 이끌면서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고통과 연결된 것이었으리라.

    제가 예수님을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은 저를 덜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예수님과 멀어진 느낌, 끔찍한 공허함, 하느님이 제 옆에 계시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고해성사 편지들은 구구구절 절박함으로 가득하다.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느낌에 공허함까지 계속되어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누구이기에 저를 버리십니까. 저는 이렇게 애타게 부르고 매달리며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입니다. 어둠은 너무나 짙습니다. 저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표면적으로는 명랑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일도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위선적인 가면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펑펑 울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1957년 예수회 요셉 노이너 신부는 독일의 한 선교잡지에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업에 대한 글을 실었다. 뜻밖에 수녀는 자신의 고뇌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쓴 노이너 신부의 회상에는 테레사 수녀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수녀님은 내적 시련을 겪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복잡하게 얽힌 환상의 희생자가 된 것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왜 그녀를 버리셨을까? 왜 그녀는 지금 이런 어둠을 겪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에게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다른 수녀님들을 지도하며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수녀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마음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떠들어대는 고약한 위선자가 된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캘커타 빈민과의 공통점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은 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차츰 고요와 평화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은 ‘굴복’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신께 굴복하니 가난한 인도인들이 단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됐다.

    모든 이에게 거절당한 채 고통 속에 버려진 캘커타 거리의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영성생활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료 수녀들의 모습도 새롭게 보였다. ‘그녀들이 점점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오랜 내적 어둠 속에서 신의 부재를 느끼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큰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다.

    1975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은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5개국 85개 분원에 3000명 이상의 수녀를 가진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후 전세계로 급속히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언론이 마더 테레사와 캘커타의 기적에 주목했다.

    마더 테레사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다. 1987년 멕시코 슬럼가를 돌보던 때에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켜 미국에서 가슴에 심장 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술 후에도 “나는 선 채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며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했다. 1996년부터 테레사 수녀는 자주 입원했다. 말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도 큰 고통을 겪었다. 이즈음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너무 많은 것을 (나에게) 원한다”는 말로 심적 고통을 표현했다.

    1997년 9월5일 오후 9시30분, 테레사 수녀의 목숨이 꺼졌다.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최후의 순간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녀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며 ‘하느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누군가 “마더,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마더 없이 살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면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천국에 가면 여러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을 비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두 똑같은 육신을 갖고 태어나지만 정신의 숭고함으로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마더 테레사는 증명해냈다.

    출처>신동아 2009.4.1 세기의 철녀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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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평전 "인류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를 읽고

    작성자 :  장금애 (셋넷학교-탈북청소년 교육공동체 :문화적응 대안주말학교)

    툭한 기형의 발, 햐얀 사리에 감싸인 굽은 등, 소나무 껍질 같은 손,'''''그러나 그것은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찾아 돌아다닌 발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수그린 등이었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향해 내민 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숭고한 어머니 "마더" 라고 부른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독살당하면서 생각과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18세 때 수녀가 되어 인도로 가겠다는 결심, 만류를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갖게 되었다.
    아그네스 곤자의 집은 부유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고,하루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작은 정성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똑같은 하루라도 특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가슴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극진히 대접해야 할 사람들이란다. 우리와 피를 나눈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 형제들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거라"
    아그네스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어머니를 보는 것으로도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워 더 강인할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그네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았다. 아그네스는 훗날 어른이 되어 죄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불행으로 내모는,그들에게서 사랑하는 가족을 앗아가는 전쟁에 반대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사람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마더 테레사로 활동적으로 일할 때도 그의 키는 1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했다. 왜소한 체력에 몸도 약한 편이었다.
    1928년 12월 1일 인도로 떠났다.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37일의 낮과 밤을 달리는 고된 여행이었다. 열여덟 살의 예비 수녀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땅으로 떠났다.
    몸이 왜소하고 허약한 소녀였지만, 아그네스는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뒤에는 항상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지켜 주실거다’
    테레사는 매사에 신바람 나게 일했다.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수녀였다.
    테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거룩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안는가? 테레사는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그들을 가난에서 완전하게 구해 낼 수 없다는 것은 테레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아예 외면하는 일은 더 옳지 않았다. 테레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소리를 웃어넘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테레사의 신념이었다.
    ‘저들을 길거리에서 외롭게 죽어가게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임종을 지켜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은 당신도 익히 알고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랑입니다.”
    “나는 대중을 돕기 위해 일한 일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마더 테레사에게 사랑은 생가하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것이었다.
    원치 않은 폭력으로 인해 미혼모가 되는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사회의 모습이 여성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고귀한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세상은 어머니를 비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성을 지키지 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낙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가정이란 꼭 혈연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직접 낳은 자녀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가족 이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들은 그 누구라도 굶주려서는 안 되며, 폭력을 당해서도 안 되며, 외로움에 홀로 버려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하나, 사랑뿐입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심판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병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마더 테레사는 뉴욕에 머물던 날 밤 일기에 그렇게 썼다.
    1979년 12월 10일 69세가 되던 그해 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두서없이 진행된 그의 연설에 전 세계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세상은 사랑을 원하고 있고,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보며 웃으세요. 가족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주세요……
    자기 삶을 모두 사랑하는 일을 위해 바친 사람의 이야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곁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어디에나 발자국을 남겼다.
    오늘날 나는 사랑의 힘으로 운영하는 셋넷학교에 다닌다. 병마로 겨우 일어났지만 훗날 남의 짐이 되지 않고자 시작한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감동한다.
    병도 치유하며 공부도 하려니 무척 힘들지만 부족한 저에게 많은 것을 배워주는 학교가 너무 좋다. 나를 비롯한 탈북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돌봐주고 배워주시는 우리 셋넷의 하늘같은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선생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셋넷학교에 다니는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남모르는 마음의 고통과 아품을 감수하며 크고 작은 웃음을 사랑으로 만들어 주고 계시는 교장선생님 많이 고맙습니다.

    ------------------------------------------------------------책소개

    “당신이 가진 것을 이 세상을 향해 아낌없이 베풀어도 세상은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베풀라. 당신이 이 세상을 길게, 멀리 본다면 이 세상 모든 문제는 신과 당신 사이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기도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향해 끝없이 베풀고, 무한정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마더 테레사(1910~97)가 탄생한 지 26일로 100년이 됐다. 탄생일을 맞아 고향 마케도니아는 물론 50여년 머물며 사랑을 실천한 인도 콜카타 등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벌이며 그를 기리고 있다.

    국내에는 마더 테레사의 삶과 뜻을 되새기게 하는 전기, 묵상집 등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마더 데레사-어둠 속 믿음>(바오로딸·사진)은 탄생부터 선종까지의 삶은 물론 2003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가톨릭 품계에서 성인 다음의 반열)식까지 실렸다. 인간적인 면모와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까지 수록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통역이었던 레오 마스부르크 신부가 쓴 <우리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민음인)는 테레사 수녀의 청빈한 일상, 실용적인 기질 등 구체적 일화들을 잘 보여준다. <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시그마북스)은 테레사 수녀를 세계에 처음 알린 책으로, ‘사랑의 선교회’ 성장 모습과 테레사 수녀의 명상록 등이 실렸다.

    <마더 데레사, 나의 기도>(청아출판사)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와 묵상이 잘 드러나 있다. 기도·가난·봉사·기쁨 등 각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실천을 강조하는 말들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에세이집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샘터)은 1997년 이해인 수녀가 번역한 책의 개정판. 테레사 수녀의 에세이, 테레사 수녀를 만난 이해인 수녀·조병준 시인의 글도 실렸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녜스 곤히야 브악스히야다. 18세에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서 수녀가 된 뒤 인도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50년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했으며, 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97년 심장질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출처> 경향닷컴
    2010. 12. 15. 09:45

    소개하고픈 사람, 이재석씨 아시나요?


    교육자료로 공유하겠다고 퍼온 글이에요^^

    지난해 이재석씨의 수상 광고작을 보고 정말 감탄했었지요.

    이재석씨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부메랑 광고인데(2009깐느광고제 등 수상)

    전쟁에 대해 그렇게 표현할수 있다니 넘 고맙기까지 했답니다. 

    http://ideabulb.co.kr/10051746625?Redirect=Log

     

    그동안 작품이 많아졌네요.
    그의 이력을 조금 들었었는데 이제 책도 나왔다니 아주 고무적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광고에 담긴 철학의 일관성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의 초등학교시절,그리고 입시위주의 중고등시절

    그의 진로고민은 어떠했을까요?

     

    물론 그는 남다른 노력과 또 재능과 운도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책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광고천재 이제석, 학고재 (근데, 책표지가 잘못 나온건지 온갖 데에서 '이재석'이라는데 책은 '이제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펌글

     

     

    이사람이 이재석씨입니다.

    국내 지방대를 나와서 소위 스펙이 딸려 미국에 가게되고
    거기서 성공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 되었네요.

     

    한번 보세요.

     

    참고로 사진들은 구글링입니다.

     

     

    일명 부레랑 광고입니다.

    자기가 겨눈 총이 결국 자신한테 온다는.....

     

    누군가에게는 이 계단이 에베레스트일수도 있겠네요...

    참 기발하죠??? 이걸 오르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겁니다.

     

     

     이건 공해는 총만큼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인데...오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아프리카에선 물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한다는 내용인데...

    아프리카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기발하고, 알기쉽고, 기억에도 오래 남네요.

     

     

     

    요건 지구를 초로 만들어서 지구가 더워지면 이렇게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단 한그루의 나무도 보호하자...요런 내용

     

     

     

    요건 독도에 자꾸 눈독들이는 원숭이들을 묘사한겁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담배를 피면서 계속 줄수록 당신의 생일도 줄어듭니다.

     

     

     

    많은 포크와 나이프는 사람수입니다. 우리 한끼식사의 소중함이죠. 다른사람들은 이 하나를 나눠먹으니...

    음식남기지 마시고, 항상 감사해야겠어요. 아프리카 아이들도 많이 도와줘야겠고요...

     

     

     

    요건 신문광고인데....신문지가 누군가에게는 이처럼 담요가 될 수 있다..

     

     

    요건 쓰레기 봉툰데..아주 잘 늘어나고 많이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지퍼락인데...신선함을 이만큼 오래 가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유리창을 이걸로 닦으면 진짜 잘 닦일거 같네요.

     

     

    우리가 원조해준 식량으로 미사일을 쏜다는.......

     

     

    환경 파수꾼임.. 요기에 버리셈..

     

     

    참 대단하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머리속에 들어오면서 돈도 별로 안드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재석씨도 스펙에 밀려 외국에 유학을 가서 성공한 케이슨데..

    우리나라에 이재석씨를 능가할 제 2의 스티브잡스도 많을텐데 스펙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너무 많은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뭐 점점 좋아지겠죠??

     

    암튼 이게 진짜 상상력이 아닐까요???

     

     

    출처: http://blog.daum.net/kajas0524/40

    2010. 12. 15. 09:43

    평화공정여행가 임영신씨 책

    희망을 여행하라. (2009.06.10) 임영신, 이혜영 지음 (소나무)

     

    희망을 여행하라

     

    세계 곳곳 누빈 사람도,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도 웃음 짓게 할 여행.
    유명 관광지, 맛있는 음식점을 벗어나 만남과 나눔이 있는 신선한 여행으로 빠져보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공정여행 가이드 『희망을 여행하라』. 인권, 경제, 환경, 정치, 문화, 배움의 여섯 가지 시선으로 여행을 바라보는 공정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이다. 포터를 돕는 여행, 호텔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여행, 숲을 지키고 동물을 돌보는 여행 등의 가슴 따뜻한 다양한 사례와 흥미로운 여행정보가 펼쳐진다.

    얼핏 ‘과연 즐거울까?’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단지 구경만하는 관광이 아닌 진정한 여행을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공정여행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여성을 위한 히말라야 트레킹 전문 여행사부터 코끼리 자원농원까지 네팔, 티베트, 인도, 필리핀, 태국, 쿠바, 런던 등의 실속 있는 여행 정보를 담았다. Fair Travel Story, 깊이보기, 공정여행 팁, 공정여행 루트, 새로운 여행자를 통해 접한 상세하고 다양한 정보를 숙지해서 공정여행을 떠나보자.

    이 책은 흥미진진한 여행의 역사와 대안적 여행의 역사,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다. 또 희망의 지도를 만드는 첫 번째 공정 여행 세계일주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세계의 대안여행 운동가들의 특별 인터뷰를 담았다. 단순히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여행을 넘어서 세상을 배우고, 봉사를 실천하는 새로운 정보를 찾는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가 펼쳐진다.

    평화는 나의 여행 (2006.9.21) 임영신 지음 (소나무)

     

    평화는 나의 여행평화는 길 위에 있다!

    평화를 여행하는 평화여행자 임영신의 에세이. 2003년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 소속으로 이라크에서 평화의 증인이 되고자 한 저자는 평화가 '평화로운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우고, 자신이 평화가 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은 바로 평화가 되기 위한 여행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41번째 피스보트에 올라 베트남, 인도, 스리랑카, 에리트리아, 레바논을 여행하며 갈등과 분쟁 속에서 희망을 심는 사람들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독일, 프랑스, 스위스, 필리핀 등을 넘나들며 평화여행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이 책에 담아냈다. 또한 세 아이의 엄마로서 평화여행을 하게 된 이유를 고백하면서, 이 평화여행은 언제나 계속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이라크 전쟁, 일본 젊은이들이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알기 위해 띄운 피스보트, 분쟁이 계속되는 나라에서 복수를 희망으로 품고 자라는 아이들, 침묵과 기도의 시간을 견뎌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등을 통해 얻은 평화에 대한 깨달음을 조용히 가르쳐줌으로써, 우리가 사랑을 품도록 이끈다.


    2010. 12. 10. 21:39

    진로학교 6강 소감문

    만감이 교차하는 자화상을 들여다보며  --- 공정여행가 임영신님의 강의를 듣고 

    진로학교 첫번째 소감문을 씁니다.
    6강까지 수강하는 내내 저는 마음을 두드리는 새로운 질문들을
    자녀에게 적용하기보다 제 자신에게 계속 묻고
    자서전을 읽는 심정으로 제 삶의 여정에 끝나지 않는 요구들을
    담담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제 들은 6강을 시작으로 소감문을 정리하면서
    귀한 강의들을 제 속에 잘 내면화하고
    삶의 관점과 행동반경에 발전적 변화가 있길 바랍니다.

     
    임영신님을 본 첫 느낌은(생방)
    가수 권진원님과 닮은, 선이 가늘고 여성적인 미모에
    독특한 강한 흡인력과  보이는게 다가 아닌...매력을 느끼며
    인생은 진정 불공평한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었습니다. ㅎㅎ

    저런 외모와 분위기에다 공정여행가라는 남다른 풍성한 인생여정의 전문 이력이...
    듣고 보니 저와 나이도 같은게 아닌가요 애도 셋이고 남편도 훌륭하시고...
    강의가 진행되면서 약간 질투와 시기심이 불쑥 들어설 뻔 한
    저의 부끄러운 반응에 스스로 놀라면서 지난 20대를 떠올리고 30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인생이 여행이고 나의 정체성은 "나그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 40이 넘도록 해외여행은 한번도 못해 보았습니다.
    국내여행도 새로운 만남을 전제로 하는 여행은 다섯 손가락에 들고
    관광 역시 몇 차례일 뿐입니다.

    20대 때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여러 번이었지만
    부모님께서 너무나 완강히 반대하시고
    제 인생 전체에 대한 걱정으로 여기셔서(제가 일단 떠나면 메니아가 될까봐^^;;)
    그 비밀한 걱정이 저도 부담되어 뛰쳐 나가진 못했습니다.
    졸업후에는 현장에서 진로를 찾으라고 해외에 보내시려고 까지 했지만
    제 모험심은 다시 안정감에 묶여서 여행은 제 인생과 넘 먼 얘기가 되어버렸지요.

    결혼 후에도 기회는 있었지만 여행의 초대에 계속 사양거절...(애셋이라는 부담...물론 재정도)
    ㅎㅎ 작년에는 여행가 경력이 있는 후배가 애셋두고 함께 주부휴가 다녀오자고 했지만 
    간이 콩알만해진 저로서는 아이들을 누군가 맡아준다면 모를까 절대 불가라고 오히려 설득했지요.
    남편은 뒷걱정말고 다녀오라지만 ㅎㅎ 친정부모님과 애들 고생시킬 생각에 엄두가 안 나더군요.

    일상이 흔들리는 것이 긴장되고 모험을 저지른 후 뒷수습할 힘겨움이 걱정되고
    미리 채워버리는 뒤죽박죽 그림은 소심함을 더 강화시키곤 했습니다.
    도전이라는 것과 원래 안 친했지만 도전은 남편 것,
    애들이 새도전을 원하면 지지해주는 것 정도로
    내 몫은 후방노릇하는거 잘 하자~였지요.

     
    시민운동활동가로서 열심히 9년을 살아왔고 인생의 전환점에서
    삶의 본질을 흔드는 질문에 직면하고 용기있는 선택을 한 임영신강사님의
    10여년의 여행 여정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선물은 하나님 앞에 손을 내미는 자가 받고 풀어 볼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한비야씨의 강의를 들었으면 책보다야 간단하게 재미났을지 모르지만
    (그분은 멋있는 사람이지만 전 그분의 책을 열지는 않았을 겁니다.)
    임영신님의 당당함과 수려한 말솜씨가 좀 거부감이 들더라도 ^^:; 
    갠적으로 같이 울고 웃고 평화의 희망을 꿈꿀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 삶의 겸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나눔의 근거는 자신의 탁월한 실력이나 주도면밀한 계획-사업성-능력이나
    오랜 꿈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장기에 꿈이 없었다는 약한자의 음울한 배경이나
    30에 이르도록 해외여행을 못해 보고 아시아에 문외한이었다는 경험과
    재정적 지원이 가시적이지 않은 조건이나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진 홀가분한 여행전문가가 아닌 세 아이의 엄마이고
    단지 가족들이 걱정어린 지지를 해주고 있다는 현실이
    생명력 있는 나눔이었습니다.


    주변에 보면 20대에 평화운동을 하러 방학동안에 떠나는 청년들,
    30대에 시간과 재정을 감수하고 심플하게 떠났다 오는 싱글들을 보면  격려를 하는 입장이지만
    제 현실은 때때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에 씁쓸한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이 그런 선배의 경험을 따라 가면 좋겠다 막연한 기대를 했었는데
    임영신님의 30이 넘어서 모험으로 떠난 인생을 듣자니 
    지금 이미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그 평화의 꿈이 더욱 실감나고
    여행이라는 것이 오감이 즐거운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빚어질 때
    삶의 한 부분으로 엮어진다는 사실이 내 얘기처럼 설레이고 좋았습니다.

    책이나 전해들은 얘기로 평화여행을 알았다면
    또하나의 좋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을 텐데 강사님께 직접 들으니
    우리나라가 정말 경제적으로나 사회의식이 많이 성숙해졌구나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희망을 꿈꾸기에 좀더 열렸구나
    감사한 맘이 들었습니다.        
      
    전 20대에는 아프리카와 아랍을 포함한 아시아권과 동유럽, 중앙아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고 분쟁지역이거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 대해 걱정하는 맘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북한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계속 관심을 두고는 있었지만 맘 뿐이었고
    mbc에서 한밤중에 방영하는 <W>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고
    사회적으로 빚진자의 정체를 잊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W라는 알파벳은weak(약자), woman(여성) 등 주로 세상(world)의
    억압받는 사람들을 주제로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잠시나마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 악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에 종영한 것에 대해 넘 미안하고 서명운동이라도 해서 살렸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생각에 머물고 끝나 버렸습니다.

     임영신님의 강의를 들으며 한 시민운동가가
    평화공정운동가"라는 정체성을 갖은 것이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얼마나 현세상이 요구하는 절박한 일인가 가슴 절절했고
    뭐든지 20년 앞서는 일본이 "PEACEBAOT"를 운항하는 것이
    얼마나 발전하고 성숙한 면모인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전 성장기를 나름 감성적이고 자유롭게 지냈고 사회적으로 연약했습니다.
    근거없는 낙천주의자였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몸이 고단한 것은 겁내고 가슴과 머리의 활동만 좋아했습니다.
    대학까지 줄곧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니 사실 매우 게으르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도전해 볼 용기도 없었습니다.
    몸도 둔하고 불편에 예민하고 모험에 따르는 걸림돌에 늘 주저 앉은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을 생각할 때 미안하지만 저보다 훌륭하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경험을 많이 해서
    사소한 불편이나 불안요소에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며
    생각하는 방향이나 방법이 넓고 명분이 있고
    늘 겸허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늘 관계지향적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맘이 깊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이런 바람들은 제가 사는 인생여정을 나그네처럼 살아야한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이룰 것을 다 가져야 한다는 야망이 있다면
    지금 저의 삶은 참 더없이 지치고 허망할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이 땅의 깨어짐을 잊지 않고
    가난과 질병과 억압의 분쟁 속에서 희망를 꿈꾸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뿐 아니라 삼형제와도 지속적으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지구촌의 빚진자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며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 가는 삶에 대한 관심이 흘러가게 해야겠습니다.    
         
    엄청난 양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듣고 강사와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열혈자원봉사자 무급 상근자anny님 말고는
    그렇게 오타 없이 스페이스바 없이 좔좔좔 (초)속달변이신 분은 처음이다
    감탄했습니다.^^;;

    연약한 몸짓으로 평화를 일구는 임영신님의 개척하신 좁은 길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열심히 다고진 걸음으로 한걸음한걸음 내딛는 평화를 위한 공정여행에
    우리 사회가 동참하며 국가적 체질도 더욱 건강해지고
    OECD국가의 정체성이 선하게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2010. 12. 9. 23:19

    칭찬과 꾸중의 힘

    .

    상진아 지음, 랜덤하우스


     

    지난 2008년 제가 소모임하는 학생들의 부모님께 드린 책입니다.

    그 전부터 1주일에 한 번씩 모임할 때에 맞춰
    자녀에게 쓰신 칭찬노트를 보내 달라했는데
    좀 이상하게 쓰시는 거 같아서 (물론 읽고도 이상하게^^;;쓰시기도)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들과 구두설명으로는 방향을 못 잡으시는 분들을 위해
    선물을 했지요. 사실 제대로(?) 칭찬 하기가 좀 어렵기도 합니다.

     
    어떤 어머니들은 곤혹스러워 하시고 모든 애들은 흐뭇해 하고 ...
    요즘도 원하시는 분에 한해-초기엔 강제성 띠다가 지금은 자율-
    제가 격려의 스티커를 붙여 드리고 15번에 한번
    칭찬 노력(^^;) 선물로 자녀교육에 대한 좋은 책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의
    애매모호한 모양새의 위험성을 선명하게 해 주고
    칭찬의 건강한 효과를 위한 기술을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칭찬이 고래를 죽일수도 있다는...^^;;;

     

    2장.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7가지 칭찬의 법칙
    - 법칙 1. 칭찬의 초점을 아이에게 맞춰라
    - 법칙 2. 재능보다 노력을 칭찬하라
    - 법칙 3. 칭찬에도 눈높이가 필요하다
    - 법칙 4.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하라
    - 법칙 5. 참는 아이, 칭찬하지 마라
    - 법칙 6. 아이다움을 칭찬하라
    - 법칙 7. 아이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여 칭찬하지 마라

    자신감을 키워 주는 칭찬의 원칙을 비롯해서
    칭찬과 균형을 맞추는 꾸중의 기술도 보여줍니다.

    칭찬교육 예찬에 대한 반론으로 칭찬의 역효과를 들으며 
    <양육쇼크>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양육쇼크>라는 책이 나왔을 때
    사실 일종의 쇼크를 받기는 했지요.--;
    자녀양육에 대한 관심도와 가치무게를 마케팅이 접수했구나~
    그런 내용이 마치 유행을 타듯이
    주기를 타고 왔다리갔다리 하고
    인터넷이고 신문이고 신간 홍보랍시고
    뻔뻔하게 과장된 표현을 둘러치는 걸 보고 있자니
    새로운 흐름도 아닌데 유난히 화가 났습니다.
    제 생각에 그 책 내용은 결코 생경한 쇼크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게 견디는 내 교육관도 저런(양육쇼크) 책의 카피문구가 가끔 위로가 되고
    들썩거리는 부정적인 감정의 돌파구가 되는 건 아닌지...

    제가 추천하는 책의 겉표지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암튼 저도 오랫만에 칭찬노트 재개해야겠습니다.    
     

          


     

     

     

     

     


    2010. 12. 9. 12:59

    허니들의 몰입 : Libera "Silent night"

     사진을 클릭하면 u-tube로~

    Silent Night, Holy Night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ilent night, holy night!
    Shepherds quake at the sight.
    Glories stream from heaven afar
    Heavenly hosts sing Alleluia,
    Christ the Savior is born!
    Christ the Savior is born.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face
    With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Jesus Lord, at Thy bi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