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0. 20:43

마더테레사의 편지-내적 고통, 그 큰 ‘어둠’ ‘외로움’ ‘고통’을 넘는 인생

  • 의무감에서 벗어나
    가끔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가졌더라면 덜 고통스러웠을텐데
    그 영혼이 참 솔직했군요.
  • 완고한 주인에게 스트라이크를 벌이다니 ^^

  • 댓글 감사해요^^
    의무감이라는게 사람에 따라
    그리고 척박한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게 드러나겠지요?
    그분의 생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그래도 자신의(모든 인간) 한계에 솔직할 수 있었던 게 은혜라고 생각해요.
    그 영혼이 그렇게 스트라이크를 하지 못하셨다면 천국의 소망도 불가능했겠지요.
  • 그 인생에 고독과 어둠이 넘 무겁고 영원 같이 느껴질 때 절망으로 도망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더욱 구한 그 자세가 그분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신앙이 있고 제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왜 더 성장할 수 있는데 주춤할까 이 시행착오를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니
    넘 괴롭다 하며 저의 무력감에 통탄해 하지요 ㅜㅜ
  • 사실 그 무력감은 인간의 본질이고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때마다 한번씩 주저앉았다 일어나는게 저의 일상입니다^^:;
  •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

  • 아이들 진로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한계 그리고 헌신의 현실적 모습...
    뭐 그런거 얘기하다가 아이들과 이 주제를 나누었어요.



    테레사 수녀도 ‘신의 존재’ 고뇌
  • “내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미공개 편지서 밝혀져
    “내 영혼은 지옥의 고통 한때 천국도 확신못해”
    타임誌 ‘커버스토리’로
    • ▲ 테레사 수녀
    •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Teresa·1910~1997년) 수녀가 50년간 신앙의 위기를 겪었으며, 한때는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는 내용의 책이 나온다.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2003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 러나 미 시사주간지 타임(Time) 최신호(9월 3일자)는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 : Come Be My Light)’라는 새 책을 인용해,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며 “그는 자신이 겪은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했고, 한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책의 저자는 테레사 수녀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회’ 소속 고위 성직자이자, 그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브라이언 콜로디에추크(Kolodiejchuk) 신부.

      테레사 수녀는 1979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 러나 석 달 전인 그해 9월,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마이클 반 데르 피트(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다”고 썼다.

      이 책은 테레사 신부가 여러 명의 고해 신부들에게 보낸 40여 장의 미공개 서한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녀가 폐기되기를 원했던 이 편지들에는 ‘어둠’ ‘외로움’ ‘고통’이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1953 년 퍼디낸드 페리에(P?rier)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선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1959년 8월 로런스 피카키(Picachy) 신부에겐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적었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무신론에 관한 책들을 쓴 크리스토퍼 히첸스(Hitchens)는 “테레사 수녀 역시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깨달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 러나 저자인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기도했다”며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 출처> http://cafe.daum.net/ssaumjil/LnOm/564713

     
     


    책소개>
    마더 데레사의 서거 10년을 맞아, 출판된 적이 없는 그녀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마더 데레사가 빈곤과 가난에도 흔들림 없이 절대적 빈곤에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었지만,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로워했음을 보여준다.

    1장과 2장은 '부르심 안의 또 다른 부르심'을 받기 전에 마더 데레사의 내적 삶을 보여준다. 3장부터 7장까지는 1946년 9월 10일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우라는 계시를 받은 일과 새로운 사명을 시작하기 위해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일어난 극적인 일들,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빈민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장부터 13장까지는 새로운 부르심과 사명을 실천하는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이 책은 마더 데레사의 친밀한 초상화이다. 마더 데레사를 알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더 데레사가 어떻게 선교사업 시작했으며,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왜 늘 그녀가 기뻐했는지, 또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의 간청에 대한 그녀의 응답이기도 하다..
    2010. 12. 20. 20:15

    마더테레사의 삶이 인류에 드러내는 인문학적 가치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텅 빈 곳으로만 보입니다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느님께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마더 데레사-

     

    저글이 진짜 테레사님이 신의 부재의 마음을 담았는지 부터 한번 살펴보시죠...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어느누가 보아도 한 평생 다른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시며 키워 온 사랑이 그 누구 보다 크지만

    겸손히 그는 작다고 표현 했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앙이 있었음에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을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셨지만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저게 테레사님의 모습이였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면 그분의 미소를 그리워 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허상을 알고 있었다면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히 부탁할까요???

     차분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테레사님의 저 마음의 표현의 무엇인지 명상해 보신다면 왜 저런 일기가 나올지 이해가 되시리라 봅니다.^ ^*

     

    저 일기를 쓰고 난 3년뒤 그는 노벨상을 받으러 나간 자리에 하나님께 감사함을 돌립니다.

    저는 그분이 노벨상을 받기 3년전에 신의 부재를 느끼다 3년후에 다시 하나님을 느꼈다고 보지 않습니다

    출처> 미디어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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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의 위대함

    우리는 위대한 성직자라고 하면 평생 어떤 마음의 고통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절대 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의문’ 자체가 금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김수환 추기경을, 고민하는 성직자라는 의미에서 ‘햄릿형’이라고 하지만 추기경은 어떤 특별한 활동이나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존경받기보다, 하루하루 일상적인 삶 속에 주어지는 평범한 일과 기회를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대함으로써 성인(聖人)이 된 분이다.

    그가 남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은 종교적 삶이란 게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사랑스럽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빛나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추기경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수행했다. 그가 걸어간 길은 특별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따를 수 있고 또 따라가야만 할 보편적인 길이었다.

    인위적인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마치 어머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신 앞에 놓아버린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이 시대 가장 극적인 인문학적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가톨릭 성녀 마더 테레사의 삶이 궁금해졌다. 일생을 외국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바치고 선종한 마더 테레사는 겉으로는 한 오라기 의심도 갖지 않는 초인적 힘으로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었지만, 그의 내면 역시 어둠과 고독으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다만 남을 위해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온 존재를 흔들어대는 고뇌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정한 철녀’ 테레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곤히야 아녜스 즈약스히야다. 편의상 세례명을 쓰기로 한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26일 지중해 연안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알바니아계인 양친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상인으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깊은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 미사는 물론 매일 아침 자녀를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 나가 미사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테레사의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은 가정환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회고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잘 알고 있었다. 식탁에는 거의 매일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수다를 떠는 데 전기를 써서는 안 된다’며 전깃불을 끄고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먹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옷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에 불행이 닥쳐온 것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다. 테레사가 9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조국 알바니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피를 토하며 돌아왔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의사들은 ‘독살’이라고 했다.

    남겨진 것은 달랑 집 한 채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업하던 사람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서 자수 제품을 팔았다. 성실한 어머니 덕분에 가게는 알토란처럼 커갔다. 역경에 처해도 좌절하지 않는 어머니 모습은 어린 테레사에게 큰 가르침이 됐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테레사의 어머니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열두 살 되던 해 테레사는 성직자의 꿈을 갖게 한 결정적 인연을 만난다. 다니던 성당에 주임교수로 부임한 얌브렌코비치 신부였다. 신부는 성당에 도서관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고전문학작품을 읽혔는데 테레사는 책읽기에 너무 열중해 어머니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신부는 또 전 세계 선교사들의 활동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 벵골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활동이 테레사를 사로잡았다.

    테레사는 태어나서 처음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특히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크면 자신도 선교사가 되어 인도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다.

    테레사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수녀회에서 수녀들을 모집해 인도 각지로 보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테레사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그분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거라. 네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다르질링과 캘커타

    어머니의 이 말은 평생 테레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침반이 됐다.

    그녀는 예전 수녀들이 그랬듯 오랜 배 여행 끝에 인도 히말라야 산기슭 다르질링이란 곳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은 부자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할 만큼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본명 아녜스를 버리고 테레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의 성녀 테레지아에서 따온 것이다. 수련기간이 끝나고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있는 로레타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과 캘커타는 너무 달랐다. 수녀원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수녀원은 캘커타에서도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에 있었고, 슬럼가와 공장, 유동인구가 많은 철도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코앞에 있는 쓰레기장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바람이 불면 악취가 수도원으로 흘러들어왔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17년이나 일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가운데에 아쉬움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질병이 그칠 날이 없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수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수녀원 규칙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조용하고 청결한 방에서 창으로 슬럼가를 내다보며 ‘내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좋은가?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버려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출가할 때 다짐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이 먼 나라까지 온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들,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 손발 없는 아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 병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어떤 때는 도와달라는 환청이 들렸다.

     
    *수녀원을 떠나 거리로

    하지만 수녀원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든 곳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환속이라면 개인의 결정에 달렸지만, 수녀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 개별 활동을 하고 싶어 했기에 교회 내부에서 그것을 받아줄 리 없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를 받은 대주교는 예상대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캘커타는 정치적 종교적 대립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수녀가 혼자 거리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끈질겼다. 무려 2년여 기다림 끝에 마침내 교황으로부터 ‘1년에 한해 수도원 외 임시거주 허가’를 얻어냈다. 말이 2년이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2년 동안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테레사 수녀의 마음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 평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수녀원을 떠나 푸른 물색 줄이 그려진 하얀 사리(인도인들의 평상복) 세 벌과 작은 십자가, 묵주 하나를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빈민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선 캘커타에서 열차로 10시간가량 떨어진 갠지스 강가 파트나에 있는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호하는 법, 주사 놓는 법, 의약품 취급하는 법, 치료나 수술을 돕는 법, 응급처치, 출산을 돕는 법 등 기본 의료교육을 받았다. 외국인 국적으로는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적까지 인도로 바꿨다. 넉 달 간 수련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1948년 12월초 캘커타로 돌아왔다.

    지금과 달리 60여 년 전 캘커타는 슬럼 그 자체였다. 마을 한가운데 저수지는 큰 웅덩이 수준이었는데 주민들은 그 물을 마시고 거기서 빨래도 했다.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악취를 풍겼다. 진료소도 약국도 학교도 없었다.

    수녀는 일단 이 마을의 어른들부터 만났다. 학교를 열겠으니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웅덩이 근처 나무 아래에 학교를 열고, 주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쓰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노상교실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보였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불타는 듯한 태양 볕 아래서 허름한 면 사리를 걸친 외국인 수녀가 슬럼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장소를 제공하겠다거나 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 수녀원 학교에서 수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한두 명 찾아와 수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장소가 마련되고 협력자들도 생기자 제법 학교 모양새가 나기 시작했다. 수녀가 제일 신경 쓴 것은 청결이었다. 아이들에게 몸 씻는 것부터 가르쳤다. 몸을 씻고 온 어린이에게는 상으로 소금을 주었다. 여자애들에게는 재봉도 가르쳤다. 아이들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쁜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면 곧바로 고쳤다.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와 약국도 열고 싶었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교회’ 탄생

    1950년 10월7일 단 열두 명의 수녀밖에 없던 테레사 수녀그룹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해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사랑의 선교회’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서원으로 두었다.

    남을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돕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수녀회가 사랑의 선교회 수녀 자격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 그밖에 ‘성격이 명랑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굳센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의 강조였다.

    수녀는 또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교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선교회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도 내부에서의 반대와 오해였다. 가장 큰 오해는 테레사 수녀가 힌두교 중심지에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러운 사람들로 더럽힌다는 항의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데모가 숱하게 일어났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우리를 죽이면 하느님 계신 곳에 더 빨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힌두교도들의 반발은 두 가지 사건으로 잠잠해졌다. 불만을 접수하고 선교회에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수녀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몸을 씻기고 간호해주는 것을 본 경찰은 오히려 성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외국인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주장대로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와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 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게 하라.”

    한번은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이 결핵 말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그가 몸을 누인 곳은 사랑의 선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아와 테레사 수녀에게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30년간 사원에서 신에게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제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신 신께 경배하게 된 것은 저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이웃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선교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마더 테레사가 전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와 보니 남자는 이미 숨이 끊겼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외롭게 죽어간 사람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듯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수녀가 죽어 쓰러진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간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도도 3세기 반에 걸친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캘커타가 있는 서벵골에서는 분쟁이 유독 격렬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에 따른 인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47년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갈라졌다. 동 파키스탄은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로 완전 독립한다. 이때 인도가 방글라데시 편을 드는 바람에 서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늘 그렇듯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이었다. 목숨만 겨우 건진 사람들은 대도시 캘커타로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넘쳐나는 캘커타에 난민이 몰려들자 캘커타는 빈민소굴이 됐다. 공터뿐 아니라 공원, 도로까지 판잣집으로 메워졌다. 1971년 시청 발표에 따르면 캘커타 전체 인구 1000만 중 노숙자가 40만이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심지어 아이도 길에서 낳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흔했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상상이 간다. 어느 날은 길에서 쥐와 개미에게 반쯤 먹혀버린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시궁창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데려와 돌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니 천사가 되어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3시간 후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수녀는 사람이 홀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씨앗이 되어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인도인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은 단지 물질이나 간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그들 각자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선교회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은 이들은 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중요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다고 말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구더기가 이 여인의 몸을 파먹고 있었다. 여인을 침대에 눕히자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테레사는 “일찍이 사람 얼굴에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여인은 “감사해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지만 테레사 수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만일 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추워요, 배고파요 하면서 어서 나에게 먹을 것과 옷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여인은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사랑을 주고 갔다.’

    사랑의 선교회 활동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됐다. 테레사 수녀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시설을 만들고 수녀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 런던 멜버른 등 선진국 대도시에는 육신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멜버른 시내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창문은 닫혀 있었고 실내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서 불을 켜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수녀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겠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란 현대사회의 섬처럼 분리된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1979년 12월11일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모든 곳에 캘커타가 있다’고 한 그녀의 연설은 나눔철학의 정점을 보여줬다. 마더 테레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면 누구나 ‘사랑의 선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의 고뇌

    그녀의 일생은 믿음과 복종,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불굴의 소망으로 점철된 삶이다. 하루 중 1분 1초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 그녀는 기쁨으로 충만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겼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께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에너지는 침묵과 묵상이라는 내적 수행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내적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선교회 사업을 시작하고 3년 뒤인 1953년 3월 대주교에게 보낸 고해성사 편지에는 이런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제 안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사업’(선교회)을 시작한 즈음부터 계속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마더 테레사는 몇 해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아주 가끔 모호하게 드러냈다. 그러다 마침내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1년 뒤 테레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으로 가득했다. 아마 이런 심적 상태는 선교회라는 조직을 이끌면서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고통과 연결된 것이었으리라.

    제가 예수님을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은 저를 덜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예수님과 멀어진 느낌, 끔찍한 공허함, 하느님이 제 옆에 계시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고해성사 편지들은 구구구절 절박함으로 가득하다.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느낌에 공허함까지 계속되어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누구이기에 저를 버리십니까. 저는 이렇게 애타게 부르고 매달리며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입니다. 어둠은 너무나 짙습니다. 저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표면적으로는 명랑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일도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위선적인 가면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펑펑 울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1957년 예수회 요셉 노이너 신부는 독일의 한 선교잡지에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업에 대한 글을 실었다. 뜻밖에 수녀는 자신의 고뇌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쓴 노이너 신부의 회상에는 테레사 수녀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수녀님은 내적 시련을 겪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복잡하게 얽힌 환상의 희생자가 된 것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왜 그녀를 버리셨을까? 왜 그녀는 지금 이런 어둠을 겪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에게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다른 수녀님들을 지도하며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수녀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마음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떠들어대는 고약한 위선자가 된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캘커타 빈민과의 공통점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은 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차츰 고요와 평화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은 ‘굴복’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신께 굴복하니 가난한 인도인들이 단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됐다.

    모든 이에게 거절당한 채 고통 속에 버려진 캘커타 거리의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영성생활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료 수녀들의 모습도 새롭게 보였다. ‘그녀들이 점점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오랜 내적 어둠 속에서 신의 부재를 느끼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큰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다.

    1975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은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5개국 85개 분원에 3000명 이상의 수녀를 가진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후 전세계로 급속히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언론이 마더 테레사와 캘커타의 기적에 주목했다.

    마더 테레사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다. 1987년 멕시코 슬럼가를 돌보던 때에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켜 미국에서 가슴에 심장 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술 후에도 “나는 선 채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며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했다. 1996년부터 테레사 수녀는 자주 입원했다. 말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도 큰 고통을 겪었다. 이즈음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너무 많은 것을 (나에게) 원한다”는 말로 심적 고통을 표현했다.

    1997년 9월5일 오후 9시30분, 테레사 수녀의 목숨이 꺼졌다.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최후의 순간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녀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며 ‘하느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누군가 “마더,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마더 없이 살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면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천국에 가면 여러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을 비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두 똑같은 육신을 갖고 태어나지만 정신의 숭고함으로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마더 테레사는 증명해냈다.

    출처>신동아 2009.4.1 세기의 철녀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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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평전 "인류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를 읽고

    작성자 :  장금애 (셋넷학교-탈북청소년 교육공동체 :문화적응 대안주말학교)

    툭한 기형의 발, 햐얀 사리에 감싸인 굽은 등, 소나무 껍질 같은 손,'''''그러나 그것은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찾아 돌아다닌 발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수그린 등이었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향해 내민 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숭고한 어머니 "마더" 라고 부른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독살당하면서 생각과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18세 때 수녀가 되어 인도로 가겠다는 결심, 만류를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갖게 되었다.
    아그네스 곤자의 집은 부유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고,하루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작은 정성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똑같은 하루라도 특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가슴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극진히 대접해야 할 사람들이란다. 우리와 피를 나눈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 형제들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거라"
    아그네스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어머니를 보는 것으로도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워 더 강인할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그네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았다. 아그네스는 훗날 어른이 되어 죄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불행으로 내모는,그들에게서 사랑하는 가족을 앗아가는 전쟁에 반대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사람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마더 테레사로 활동적으로 일할 때도 그의 키는 1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했다. 왜소한 체력에 몸도 약한 편이었다.
    1928년 12월 1일 인도로 떠났다.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37일의 낮과 밤을 달리는 고된 여행이었다. 열여덟 살의 예비 수녀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땅으로 떠났다.
    몸이 왜소하고 허약한 소녀였지만, 아그네스는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뒤에는 항상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지켜 주실거다’
    테레사는 매사에 신바람 나게 일했다.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수녀였다.
    테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거룩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안는가? 테레사는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그들을 가난에서 완전하게 구해 낼 수 없다는 것은 테레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아예 외면하는 일은 더 옳지 않았다. 테레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소리를 웃어넘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테레사의 신념이었다.
    ‘저들을 길거리에서 외롭게 죽어가게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임종을 지켜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은 당신도 익히 알고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랑입니다.”
    “나는 대중을 돕기 위해 일한 일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마더 테레사에게 사랑은 생가하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것이었다.
    원치 않은 폭력으로 인해 미혼모가 되는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사회의 모습이 여성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고귀한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세상은 어머니를 비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성을 지키지 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낙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가정이란 꼭 혈연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직접 낳은 자녀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가족 이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들은 그 누구라도 굶주려서는 안 되며, 폭력을 당해서도 안 되며, 외로움에 홀로 버려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하나, 사랑뿐입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심판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병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마더 테레사는 뉴욕에 머물던 날 밤 일기에 그렇게 썼다.
    1979년 12월 10일 69세가 되던 그해 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두서없이 진행된 그의 연설에 전 세계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세상은 사랑을 원하고 있고,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보며 웃으세요. 가족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주세요……
    자기 삶을 모두 사랑하는 일을 위해 바친 사람의 이야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곁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어디에나 발자국을 남겼다.
    오늘날 나는 사랑의 힘으로 운영하는 셋넷학교에 다닌다. 병마로 겨우 일어났지만 훗날 남의 짐이 되지 않고자 시작한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감동한다.
    병도 치유하며 공부도 하려니 무척 힘들지만 부족한 저에게 많은 것을 배워주는 학교가 너무 좋다. 나를 비롯한 탈북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돌봐주고 배워주시는 우리 셋넷의 하늘같은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선생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셋넷학교에 다니는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남모르는 마음의 고통과 아품을 감수하며 크고 작은 웃음을 사랑으로 만들어 주고 계시는 교장선생님 많이 고맙습니다.

    ------------------------------------------------------------책소개

    “당신이 가진 것을 이 세상을 향해 아낌없이 베풀어도 세상은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베풀라. 당신이 이 세상을 길게, 멀리 본다면 이 세상 모든 문제는 신과 당신 사이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기도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향해 끝없이 베풀고, 무한정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마더 테레사(1910~97)가 탄생한 지 26일로 100년이 됐다. 탄생일을 맞아 고향 마케도니아는 물론 50여년 머물며 사랑을 실천한 인도 콜카타 등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벌이며 그를 기리고 있다.

    국내에는 마더 테레사의 삶과 뜻을 되새기게 하는 전기, 묵상집 등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마더 데레사-어둠 속 믿음>(바오로딸·사진)은 탄생부터 선종까지의 삶은 물론 2003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가톨릭 품계에서 성인 다음의 반열)식까지 실렸다. 인간적인 면모와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까지 수록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통역이었던 레오 마스부르크 신부가 쓴 <우리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민음인)는 테레사 수녀의 청빈한 일상, 실용적인 기질 등 구체적 일화들을 잘 보여준다. <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시그마북스)은 테레사 수녀를 세계에 처음 알린 책으로, ‘사랑의 선교회’ 성장 모습과 테레사 수녀의 명상록 등이 실렸다.

    <마더 데레사, 나의 기도>(청아출판사)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와 묵상이 잘 드러나 있다. 기도·가난·봉사·기쁨 등 각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실천을 강조하는 말들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에세이집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샘터)은 1997년 이해인 수녀가 번역한 책의 개정판. 테레사 수녀의 에세이, 테레사 수녀를 만난 이해인 수녀·조병준 시인의 글도 실렸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녜스 곤히야 브악스히야다. 18세에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서 수녀가 된 뒤 인도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50년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했으며, 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97년 심장질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출처>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