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26. 09:46

[설교]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팔복 - 뉴스앤조이

+ 아랫글은 지난 일요일 (2009. 5.24) 나들목교회 예배 설교입니다. 뉴스앤조이에서 기사로 올린 글을 퍼 왔습니다.
   설교자는 김형국 목사님입니다.
 



[설교]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팔복 
적개심 가득 찬 사회, 양심이 마비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입력 : 2009년 05월 24일 (일) 22:01:46 [조회수 : 1193] 김형국  
 
 
서론: 혼란스런 시대 속에 하나님의 마음

지난주까지 우리는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고, 오늘은 그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이 나라라는 큰 공동체의 혼란과 아픔,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늦은 저녁까지 고민한 끝에 오늘 나눌 메시지를 변경하게 되었다.

1. 만연한 적개심

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이 혼란스런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팔복과 연관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적개심이다.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사회적 분노가 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덧글을 보면 원 글의 논지는 사라지고 상처만 남는 경우가 많다. 악성 댓글은 이러한 사회적 분노의 웹상 표현일 뿐이다. 어제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로 곧 누가 이 문제의 책임을 질 것이냐는 공방이 시작될 것이다. 그 책임은 언제나 내가 아닌 상대방을 가리키고 있다. 이 공방은 결국 한국사회를 찢어놓을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적개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 나라의 수장을 향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적개심과 인격 비하가 있었는가. 리더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었다. 자살하라고 권유한 노학자가 있었다. '돈의 성격과 액수를 보면 그야말로 잡범 수준'이라며 '노무현을 버리라'는 집필가도 있었다. 서거라는 말 대신에 자살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원로 언론인도 있다. 한 나라의 수장이었던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인가. 그 글들에는 가득 찬 적개심이 드러난다.

사실 이 설교를 통해 노무현 前 대통령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 적이 생긴다. 편이 나뉜다. 상대방은 무조건 틀렸고, 그렇기에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나) 예수님의 가르침 - 평화를 만드는 삶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마 5:9)

예수님은 편 가르기와 적개심에 빠진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평화를 이루기 전에 먼저 내 속에 형성되고 세뇌된 분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상대를 비하하고 싸우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상황 속에 한국교회도 가담해 한편이 되지는 않았는가. 적개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기 전 그릇된 분노를 돌아봐야 한다. 이 분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정화하여 분노의 재생산을 막아야 한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붙이면 안 된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 특히 소수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이념적 편향과 취향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내 신념마저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소리를 내기 전에 양쪽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서로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중재자로서 각자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양심의 마비

가) 우리 개개인의 슬픈 자화상

두 번째는 양심의 마비이다. 사회적으로 표현하자면 공의의 마비라고 할 수 있다. 적개심이 큰 것은 양심과 공의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어렵다. 언론을 보면 옳지 않은 소리를 너무 기막힌 기술로 옳다고 이야기할 때가 많다. 조작으로 선악을 바꿀 수 있는 시대다.

그동안 보수 언론은 편향적이고 부정확한 보도를 해왔다. 이는 그것에 동의하는 다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보 언론은 지금까지 노무현 前 대통령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아무런 말을 못했다. 공권력의 위협이 두려워 침묵해온 것은 아닌가. 이제 와서야 검찰이 심했다고 말하는 진보적인 학자나 언론들이 있다.

지식인과 언론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는 세상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깨어진 것은 알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문제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문제 많은 사회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세우는 일에 둔감해졌다.

나) 예수님의 가르침 - 깨어 있는 삶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 5:6, 8 )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른 질서, 사회적으론 공의를 뜻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양심이 깨끗한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깨어 있는 삶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준을 찾아야 한다. 기준을 갖고 자신을 성찰하는 게 기도다. 그래서 침묵기도가 필요하다. 기도할 때 무뎌진 양심이 살아나고 버젓한 불의를 공의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분명한 기준과 성찰 없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죽은 지식이며 편을 가르는 일일 뿐이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 스스로 공의로운 사람이 아닌 깨어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

또한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 깨어진 세상의 한 부분만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갑자기 사회운동에 뛰어들라는 게 아니다. 자기 자리에 다양한 섬김의 현장이 있다. 깨어 있는 만큼 참여해야 한다.

3. 죽을 만큼의 외로움

가) 우리 관계의 슬픈 자화상

이 시대는 소통이 빈번한 시대이다. 그러나 그 소통의 대부분은 비본질적인 소통이며, 진실하고 진정한 소통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자살이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그의 삶을 돌아보면 쉽게 자살을 선택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요즘 많은 이들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자살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쉽게 한다. 생존을 위해 나무뿌리를 삶아 먹으면서도 살아낸 시대가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는가.

우리 사회 속에 죽을 만큼 외로운 자들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노 대통령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그에게는 정치적 동지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깊고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고통보다도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변화와 다양성 속에 개인의 소외는 심해졌다. 우리 주변엔 그렇게 외롭고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 예수님의 가르침 - 사람을 돌보는 삶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 5: 5, 7)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을 돌보는 삶, 온유와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이 없지 않지만, 우리에겐 수직적으론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수평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의 사랑과 위로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 자비와 온유를 주고받는 인격적이고 책임성 있는 관계로 부르셨다.

한 주를 시작할 때 이번 한 주간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생각하고 기도하라. 연락하고 밥 한 끼 함께 먹으라. 지난 한 주간 몇 명을 위로하고 자비를 베풀었는가. 우린 모두 위로와 자비를 받기만을 원하지, 먼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온유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키워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꿈꾼다.

결론: 반문화적 삶을 사는 이유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1-12)

세상에는 적개심이 만연하고, 양심은 마비되었으며, 죽을 만큼의 외로움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태반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팔복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반문화적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불편하고 고난과 박해를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 (마 5:3-4)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타협한다.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애통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가난하고 애통한 자를 향해 하늘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 앞에서 가난하고 애통해야 그렇게 살 힘을 얻을 수 있다.

당분간 한국사회의 혼란은 심해질 것이다. 언론에서 온갖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미디어에 좌지우지하지 말고 팔복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고민해야 한다. 가난해지고 애통해지자. 주님의 시각으로 사회를 해석하고 나를 성찰하며 삶에 적용하자. 팔복을 다시 읽으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 5 : 3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