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6. 21:47

귀헌이의 과제 <석주명 박사> (6편)

답변자 : maxman0319     l    2008-09-03 22:44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박사 석주명(石宙明, 1908. 11. 13 ~1950. 10. 6)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서, 13세인 1921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그는 1926년 3월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의 관문을 뚫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서 유학길에 올랐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년간 근무하면서 나비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는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는 채집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는데, 훗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국산 나비 분포도>는 생물지리학상 세계 학계의 유례가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이 새로운 종의 남발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석주명은 10년 연구 끝에 1940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석주명이 나비와 함께한 세월은 역사의 격동기였으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어딜 가나 생명보다 더 아끼던 지도 500장을 배낭에 넣어 메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50년 9월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나비 표본이 모두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나비를 쫓아 평생 산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그는 나비들의 뒤를 쫓아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간 것이다. 석주명!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 .




답변자 : emyc0428     l    2008-08-27 16:16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 박사 석주명(1908~1950)


석주명(石宙明, 1908년 11월 13일 ~ 1950년 10월 6일)은 한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언어학자이다

학창시절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이는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석주명이 민족문제과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같은 동물을 좋아해 짐승을 길렀으며, 1921년에 서울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겨 1926년에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는 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敎)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고,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는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재학시 지도교수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곤충에 관심이 많은 제자에게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며 나비 연구를 권했고, 석주명은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붙여준 나비이름으로는 지옥나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깊은산부전나비 등 다양하며, 학명에 그의 성(Seok)을 붙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석주명은 불행해지고 말았다.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국립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석주명 자신도 1950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죽었다. 죽기 직전에 석주명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저서
《A synonynic List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나비 총목록)》, 1940
《제주도 방언집》, 서울신문사, 1947
《제주도 생명조사》, 서울신문사, 1948
《제주도관계문헌집》, 1949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1949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 신양사, 1992

  김은미 님의 글입니다.



A : 나비박사석주명
답변자 : ysh200531     l    2008-08-28 17:39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同種異名)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점

산네발나비의 앉은 모습
흰무늬왕불나방의 앉은 모습
혹시~ 탱자나무 잎에서 애벌레를 본 적이 없나요.그 징그러운 몸에서 그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나온답니다. 나비와 나방은 비늘로 덮인 2쌍의날개를 갖고 있고 애벌레는 주로 식물의 잎을 먹기 때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나비는 낮나비와 밤나비로 불리기도 하는데 낮나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비로 주로 낮에 활동을 하며, 밤나비는 나방이라고 부르며 주로 밤에 불빛에 모여듭니다. 생김새로의 구분은 나비의 더듬이는 곤봉모양이며, 날개를 모아 세우고 앉으며, 몸이 비교적 가늘고 작지만 나방은 더듬이가 바늘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거나 빗살모양이고 날개를 활짝 펴서 앉으며 몸이 퉁퉁한 것이 많지요. 또한 나방은 잡으면 비늘가루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비는 요...... 1. 주로 낮에 활동하며 날개 색이 곱고 화려하다. 2. 더듬이- 끝이 곤봉 모양으로 부풀어 있다. 3. 대부분 날개에 비해 몸이 가늘고 쉴 때도 날개를 펴거나 위로 접을 때가 많 다. 4.1만종정도
나방은 요....... 1. 대부분 밤에 활동을 하고 날개의 색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어두운 편이다. 2. 더듬이- 실 모양, 톱니 모양 또는 깃털 모양으로 다양하다. 3. 몸이 크고 날개를 겹쳐서 앉는 경우가 많다. 4.18만종 5.주로 밤에 활동하고 수평으로 날개를 편 채 쉰다. 6.날기 전에 몸을 흔들어서 열을 내서 체온을 높인 뒤 난다.
답변참고 >> 네이버 지식


A : 나비박사 석주명
조언자 : beblbc     l    2008-09-03 21:53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몰라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될지... 일단 올려드립니다

지역성’살린 연구로 ‘조선적 생물학’개척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조언참고 >> 소년조선일보

  이병철 님의 글입니다.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hanho0605     l    2008-09-04 00:52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일명 나비학자로 불리는 석주명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야후에서 검색하고
야후꾸러기에서 관련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석주명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있는 곤충들을 연구하신 그런 곤충학자로 유명하신 분 입니다.
아래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석주명 곤충학자
  •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 출생지 : 평남 평양
  •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석주명 - 야후!꾸러기 [현재창]
    업적, 학문, 생애 소개 학습자료 모음.
    kr.kdir.yahoo.com/directory/... /history/biographies/suk_jumoung (17k)

  한종호 님의 글입니다.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비공개    l    2008-09-05 19:40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 석주명 곤충학자
  •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 출생지 : 평남 평양
  •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출처 : 야후! 통합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