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5. 12:11

전쟁의 끝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

http://ideabulb.co.kr/10051746625?Redirect=Log

 

2009년 깐느 광고제를 비롯한 각종 광고제를 휩쓴 작품입니다.

제가 퍼 나르는 재주가 없어서 링크를 걸어 봅니다.

 

즐겨찾기를 해 놓은 게시판인데 작년에 그 공익광고를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이 종식되길 바라는 맘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큰 아들을 야밤에 비이성적으로 혼내며 전쟁을 일으키고

지옥에 다녀왔습니다. ㅜㅜ

 

내가 선 곳에서 피스키퍼(peace-keeper)로도 피스메이커(peace-maker)로도 

지나치게 불충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저의 삶에 늘 바람직한 과제입니다.

 

6월 내내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책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역사의식을 바로 갖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지난 우리 역사 속의 기독교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변혁과 소망에 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어제는 둘째 녀석 "6.25전쟁"에 대해 공부해 가는 것이 숙제이고 오늘 골든벨한다고 해서

저녁밥도 대충 먹이고 인터넷 뒤지며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부끄럽게도 6.25전쟁에 대해서 비로소  "이제야 조금 알겠다" 경험을 하였네요.

 

지금 tv에서는 6.25기념식 생방을 하고 전 들으며 이렇게 몇자 적고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식순에 의해 말씀 중입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아까 첫 식순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이 참 뭉클했습니다.

이런 아침 10시 국가기념행사를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지만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것은 처음 보았고 (우리 애국가 가사 참 특별하지 않습니까?)

초대된 연령이 다양해서 그 합창은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답고 힘찬 함성 같았습니다.

마이크에 가까운지 바이브레이션 심한 아줌마 합창단 소리와

맑고 고운 자연스런 어린이들의 합창 ...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애국가를 부르시는 할아버지 정치가들 참전 용사들...

 

우리 나라가 경제적 국제적 위세가 높아지기는 한 걸까요?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참전국 대표를 초대해서 감사패를 드리며

각국어로 "감사합니다" 멘트를 해 드리더군요.

우리 나라 보다 어려운 나라에게는 재정적 지원도 좀 많이 해 드리면 좋으련만...

 

어제 자료를 정리하며 맘이 참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승되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아침에 남편 말이 우리 나라 초등학생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6.25에 대해 넘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더라 하더군요.

20년 전 우리가 국사에 대해  달달달 암기하고 있을 때

일본 학생들 자기 나라 역사 넘 몰라 큰일이라더라 하는 보고가 기억납니다.

여러모로 일본의 20년 전를 따라 잡는 것이 하나 추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엉뚱하게 "그럼, 우리 농업은 10년 안에 '소농'으로 자리 잡을려나?" 하고

희망찬 웃음을 지었습니다 ^^;

 

제가 넘 얘길 산만하게 하지요? ^^;;

 

기회가 있음 제가 교회에서 들은 강의 내용을 한번 올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게시판에 들어오셔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속의 그리스도인>   http://www.nadulmok.org/

06/06 '진리와 자유의 하나님과 함께한'-양현혜교수-

06/13 '낮고 약한 자의 하나님과 함께한'-한완상장로

06/20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한'-임동원장로-

 

기독교인이 아니셔도 들으실 때 별 거부감 없으시리라 생각 됩니다.

 

엉뚱한 거 하나더...제가 다른 나라 애국가를 거의 모르는데

월드컵 보면서 아르헨티나 애국가를 듣는데 울컥 했답니다.

와~~ 가사랑 곡 자체가 그리고 경기장을 울리는 제창이...

살아있는 역사를 담았구나 싶더군요. ^^

 

오늘은 6.25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초등학교 때 울며 부르던 게 생각 나네요ㅜㅜ

아아 우리가 무기 들이밀지 말고 꼭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2010. 6. 25. 12:08

김교신 선생님(한국 종교인·교육가) [金敎臣]

1901 함남 함흥~1945. 4. 25.
종교인·교육자.
개요
김교신 /김교신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다.
신앙의 형성기
아버지는 염희(念熙)이고,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에 접했다. 노방전도에 깊게 감명받아 4월 18일부터 도쿄 우시고메 구[牛區]에 있는 성결교회에 출석,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1월 교회내분에 깊은 충격을 받고 6개월 동안 교회출석을 끊고 방황하다가, 일본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면서 체계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뒤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갔다. 그는 우치무라를 그리스도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옮겨 1927년 3월 졸업했다.
국내활동
1927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이후 1940년까지 12년간 재직을 하다가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또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박물학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교사활동 이상으로 천직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 〈성서조선〉이라는 월간 종교잡지 발행과 성서연구집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함석헌·송두용·양인성·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생들의 동인지로서 창간되었다. 제16호까지 편집책임자는 정상훈이었지만, 1930년 5월 제17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1942년 3월 제158호까지 발간하였다. 〈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성서연구회와 동시에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계속했다. 성서연구회 및 성서집회에서 행한 연구 및 강의·강연은 〈성서조선〉에 게재되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만들어내,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종교활동·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확신했다. 〈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 권두언의〈조와 弔蛙〉가 조선민족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송두용·유달영·김교신 등 13명이 투옥되어 1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김교신은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1944년 질소비료공장회사에 현지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을 위하여 교육·의료·주택·대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징용된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죽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신앙의 핵심은 〈성서조선〉의 간행사에서 밝힌 바와 같은 순수한 '조선산(朝鮮産) 그리스도교'의 수립이었으며,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서양 교회의 모방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시종 반선교사적(反宣敎師的) 색채로 차 있었다. 조선산 그리스도교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예수의 복음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적 애국심으로 발현되었다. "김교신이 예수보다도 그의 조국인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한 송두용의 회고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조국독립)과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일체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민족적 과제의 인식과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독립이라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민족의 고난을 지고 투쟁해나가는 생활 속에서 그의 신앙은 이른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으로 믿어지는 속죄·부활·재림의 신앙으로 중층적으로 발전해갔다. 〈성서조선〉의 초기시대인 1930년대 초반까지는 속죄신앙이 중심이며, 1935년 무렵부터 부활신앙이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 문제 등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많은 신도들이 절망 속에서 개인적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구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는 부활신앙에서 재림대망신앙(再臨待望信仰)으로 나아갔다. 〈조와〉라는 글은 그의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의 확신을 표명한 것이며, 표현은 극히 성서적이나 그 속에 투영된 내용은 민족해방을 갈구하는 강렬한 지향을 담고 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이 우리민족에게 위탁한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고난의 역사를 바탕으로 찾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저서로는 〈산상수훈연구〉(1933)·〈우치무라와 조선〉(함석헌 공저, 1940) 등이 있다.
朴千佑 글
2010. 6. 25. 12:01

이승훈 선생님 (한국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李昇薰]


1864(고종 1) 평북 정주~1930.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개요
이승훈 /이승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종이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