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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16 우리 문화와 사대문 --- 김선규 님
- 2008.08.25 기독교는 X다 ---이대귀님
우리 문화와 사대문 --- 김선규 님
우리 문화와 사대문Category :: 생각들 |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저는 TOEFL학원을 다닙니다.
네 과목을 듣는 종합반인데, Reading과 Listening은 매일 수업이 있고,
Grammer하고 Writing은 격일로 수업이 있지요.
이 수업들 중에서 Listening 수업의 선생님은 우리 나라, 현재 정치, 사회 문제 등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수업시간 마다, 광우병이니 명박이 아저씨니 하는 얘기를 하거든요. 오늘은 숭례문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움을 강조하시더군요. 사실, 우리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우리 문화 킹왕짱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랑스러움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크기로 하자니 자금성이나 베르사유 궁전에 안되고, 오래된 걸로 얘기하자니, 중동에 있는 애들한테 안되고, 우린 그래도 조낸 아릅답다라고 주장하자니 객관적인 기준이 없고, 이러니 마음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한데 표현하기는 힘든 상황이 되는 것이죠.
사실 이게 당연한 일입니다. 볼 줄을 모르니 설명을 할 수가 없는거죠. 우리 문화는 은근한 멋이 특징입니다. 내가 열 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그 중 하나, 두 개만 툭 하고 꺼내놓는 식입니다. 그 단서
돈만 꿔달라고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낼 때 술도 한 병 같이 보내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친구는 술은 빼고 돈만 보내면서 이렇게 답을 합니다. "세상에 양주의 학이란 없는 법이지요"
바로 요게 묘미입니다. 이 친구가 말한 "양주의 학"이 뭔지를 알아야 수준있는 대화가 되는겁니다. "양주의 학"은 유래가 이렇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서로 소원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돈을 벌기를 원하고, 어떤 이는 양주의 지사가 되기를 원하고 (양주는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 중에 하나지요, 운하가 있어서 뒷돈도 많이 들어오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 친구는 요즘 말로 하자면 서울 시장 하고 싶다는 얘기지요), 또 어떤 이는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 (신선이 되고 싶단 얘기겠죠?)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친구가 말하길, 난 10만관의 돈을 허리에 차고, 학에 올라 앉아 양주의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얘기를 합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주의 학이란 세상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돈은 꿔줄테니 술은 다음에 마셔라란 뜻이 되는 거지요.
숭례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숭례문은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그 아름다움보다는 그 뜻이 더 멋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사대문은 동양적인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데, 그 숨은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선조들의 멋스러움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동양에서, 특히 유교적인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이상은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이걸 일컬어 '오상(五常)이라고 합니다. 흔히 얘기하는 '仁', '義', '禮', '知', '信' 이지요, 이걸 조금 더 확대시키면, 캡핀 플레닛의 나무, 쇠, 불, 물, 흙이 되고, 푸른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 누런색이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걸 가지고 우리 나라의 사대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흥인문(興仁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짊을 나타내는 문입니다. 방위상으로는 동쪽이고, 색깔은 청색이며, 계절로는 봄이 되닙니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자면 어린 아이의 시절이죠. 그럼 왜 동대문을 어짊을 일으키는 문이라고 했을까요? 봄이 되면 모든 생명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10달의 기다림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어질다라는 것은 보살핌을 나타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살핌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물의 소생을 보살핀다는 뜻에서 어짊을 일으킨다라고 한 것입니다. 봄의 가장 특징적인 색은 그래서 청색이고, 오행상으로는 나무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천지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수풀이 무성해지고, 풀들은 꽃을 피우고, 온갖 곤충들이 애벌레에서 성체로 변합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청소년기로 들어섭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매일 요즘 애들 욕하는 이유가 뭡니까? 개념없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 말고는 모든 천지만물이 개념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나무와 풀과 동물과 곤충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성장하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라야 할 만큼 자라고, 제 때에 태어나고, 제 때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를 숭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 안에 힘이 가득하기 때문에 계절로는 여름이고, 가장 에너지가 많은 남쪽이 그 방위이고, 뜨거움을 상징하는 불과 어울립니다. 당연히 어울리는 색은 붉은 색이지요.
가을이 되면 자신이 봄, 여름 동안 한 일을 가지고 평가를 받습니다. 가을은 평가의 계절이고, 옳고 그름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합니다. 의로움을 도탑게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직 이 나이가 안되봐서 잘은 모르지만, 인생의 가을, 즉 중년이 되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의로움, 옮고 그름을 가리는 냉철함이 아닐까합니다. 그 전에는 사실 뭔가 부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기 쉽지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되고 힘이 있어야 비로서 딴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방위로는 서쪽이고, 색은 희며, 오행 중에는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쇠와 연결이 됩니다.
겨울은 내년 봄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대비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겨울을 상징하는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고 합니다. 지식이 넓어지는 문이라고 한 것인 이때 비로서 인생의 모든 시기를 거쳐 비로서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사물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뜻하는 물과 어울리고, 깊음을 뜻하는 검은색과 짝이됩니다. 방위는 북쪽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자리에는 '信'이 오게 됩니다. 사계절이 수천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심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오행 중에는 가장 근본인 땅에 해당이 되고, 누른색이 이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황제만이 누른색옷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의 근본을 상징하는 황제만이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런 상징성때문에, 사대문 중앙에 바로 보신각(普信閣)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문화는 그 이면을 이해해야만, 그 상징성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겠습니까? 우리 문화를 존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문화를 존중하겠습니까? 좀 배웁시다.
http://www.thedreamis.com/
기독교는 X다 ---이대귀님
기독교는 X입니다.
글쓴이: 대귀, 첨부: 날짜: 2008-08-25 11:54:33
도피할 것인가, 기독교화할 것인가, 나그네로 살 것인가
"기독교는 X입니다"라고 쓰면 기독교를 욕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하겠다 싶습니다. 기독교는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크엘룰이 기독교를 X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최근 제자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의미, 교회,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듣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많은 회개와 숙고를 하게 됩니다. 이런 분투와 고민들을 우리 공동체가 잘 해내고 있고, 더 잘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 시대에 우리와 더불어,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애쓰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런저런 많은 사이트들이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신학적 토론과 현 한국 상황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분들의 공간들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싸이월드에 자주 가는 두 곳이 있습니다. 최근 모두 허가제로 바뀌고 활동정도에 따라 회원등급이 올라가게 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음주의 evangelical.cyworld.com
김기현목사의 신학광장 club.cyworld.com/ezrakim
그리고, 첨부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신광은 씨의 글을 함께 올립니다. 긴 글이지만 우리 공동체에서도 이미 선언되었던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글 말미에는 토론질문들도 있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자크엘룰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과 국가에 대한 내용들도 나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 길다 느끼시면 중간에 소제목들을 훑으시면서 궁금한 것만 발췌해도 도움이 되실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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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by 신광은
1. 문제제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가령, 예수님을 안 믿던 청년 A군이 믿기 시작했다고 해보자. A군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통념상, A군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우선 예배에 출석한다는 말이다. 주일예배, 삼일예배, 금요철야, 청년부 예배, 그리고 새벽예배까지 예배의 횟수와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켜 A군이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한다. 아울러 헌금도 하기 시작한다. 주정헌금에서 시작해서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일천번제 등등.. 헌금 항목과 액수가 늘어나는 것을 가리켜 ‘잘’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 봉사도 할 것이다. 청년부 임원, 리더,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기타 몸으로 때우는 일, 머리 쓰는 일 등에 시간과 재능을 기꺼이 내놓으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말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전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자고로 사람들을 많이 물어오면(?) 믿음이 ‘좋다’고 박수 쳐 준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이런 것일까?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 어느 회사가 믿음의 기업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굳이 회사가 아니어도 좋다. 학교라고 해도 되고, 국가라고 해도 상관없다. 자, 회사나 학교, 국가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 기독교 국가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통념상 기독교 학교나 기독교 기업, 또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인구조사 설문지 중 종교란의 기독교에다 ‘√’ 표시를 많이 하면, 특히 사장이나 교장, 대통령과 같은 대표자들이 그렇게 하면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 기독교 국가라고 불러 준다. 기왕이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채플 시간이나 신우회 모임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때 백마부대 안에는 ‘임마누엘 부대’라는 것이 있었다. 이들이 ‘임마누엘(Immanuel),’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부대라고 불리운 이유는 100% 크리스찬으로 구성된 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을 수행해야 했고, 베트콩 군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죽여야 했다. 이와 비슷한 예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군대인데 그들의 철모에는 “Gott mit Uns”(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부대를 ‘기독교’ 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예수님을 믿는다는 痼?고작 지금 말하는 이런 종류의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이 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란 별로 없을 것이다. 기독교란 그저 한 국가 안에 존재하는 공인된 여러 종교 중 하나 정도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고,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사회학적 집단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가끔 장로님을 대통령으로 만들 때나 집사님을 국회의원, 혹은 시의원에 당선시킬 때 표를 몰아주는 표밭 정도.., 또 서태지의 음악을 못 듣게 하도록 청소년들을 부추기거나 ‘붉은 악마’를 ‘백의 천사’나 ‘붉은 호랑이’로 개명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압력 단체쯤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길거리 청소를 한다거나 교회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를 열 수도 있을 것이고, 복지관을 운영한다거나,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사회사업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기독교 신앙인가? 이런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냐는 말이다. 과연, 예수님은 인류에게 괜찮은 종교 하나를 선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2.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
1) ‘X’
기독교도 이 땅에 있는 여러 종교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 이상이다.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기독교를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X’라고 했다. 그가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X라고 부른 이유는 기독교라는 이름에 너무 종교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X다. 기독교는 종교, 문화, 학문 등 이 세상의 다른 어떤 범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지상의 미스테리, 즉 X다. X로서의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존경과 숭배를 받는 것들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뒤엎는다. 예컨대 기독교는 돈의 권세를 뒤엎고, 국가의 권세를 떨게 만들며, 종교, 문화, 도덕과 같은 것들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전복시킨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워질 때면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혁명적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해 왔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를 사도행전 19장에서 볼 수 있다. 바울 사도의 세 번째 전도 여행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2년 넘게 사역을 했고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19장에 따르면 바울의 사역이 너무도 성공적이서 “이 도(道, 복음)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폭동)이 있었으니”[행19:23]라고 기록하고 있다. 복음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에베소는 아데미라는 여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많은 참배객과 순례자, 관광객들이 아데미 여신에게 참배하기 위해서 에베소를 방문했고 에베소시는 이들에게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 판매하여 큰 수익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여신상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순례객들은 그것을 사서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모셔놓고 예배도 드리고 그랬는데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19:26]고 전한 것이다. 놀랍게도 바울의 이 가르침을 사람들이 믿고 더 이상 그 여신상을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신상 제작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집단 시위를 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우상숭배 금지 캠페인을 한 것도 아니고, 망치를 들고 다니며 여신상을 때려 부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그 여신상이 신이 아니라고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혁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전택부는 「토박이 신앙산맥」에서 개신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예수쟁이’로 불리워진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쟁이’라는 말의 의미 중 하나는 병자나 환자를 비하하거나 놀리는 의미이다. ‘폐병쟁이,’ ‘콜록쟁이’ 등이 그 예이다. 그러니까 ‘예수쟁이’하면 예수병 걸린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수교를 전염병처럼 여겼다. 전염병이 한 번 돌면 마을과 고을이 쑥밭이 되고 마는데 예수교가 들어가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슨 도깨비장난도 아니고, 이상하게 예수 복음만 휩쓸고 지나가면 “사람들이 덜덜 떨고 절반 미치고 한 가문이 망”하는 대사변(?)을 겪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마을이 완전히 결단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을 예수쟁이라고 불렀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혁명을 불러일으킨다.
2) 진짜 믿음
이러한 기독교의 혁명성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에서 온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이끌어 내게 되어 있다. 믿음에서 실천이 나오고 이 실천이 기독교를 혁명적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믿음이랑 행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행동을 너무 쉽게 분리해 버린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또 교회에서는 이런 설교를 자주 듣는다. 믿음은 구원을 얻는 방편이요, 행위는 상급을 얻는 수단이라고. 그래서 크리스찬이나 교회가 무슨 잘못을 하면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라고 단정해 버린다. 이 말대로라면 행위가 형편없어도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저 상급만 조금 줄어들 뿐. 기독교인은 자신의 행위 없는 모습을 변명하는 데 너무 익숙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냐는 둥,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것이라는 둥, 비판하지 말라는 둥,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둥 변명도 가지가지다. 그러나 과연 성서가 이렇게 가르치는가?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했다. 이유는 야고보서가 믿음보다는 행위를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자세히 읽으면 야고보는 믿음보다 행위를 더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짜 믿음은 무엇인가? 야고보서에 의하면 그것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확증되는 믿음이다. 야고보서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등등의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그것을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아주 자극적인 어조로 그런 믿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귀신의 믿음’[약2:19]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런 정도는 귀신도 잘 알고 있고, 또 아주 잘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믿지만 순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신은 믿음이 있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을만한 진짜 믿음은 무엇인가? 야고보서에서는 이것이 여러 번 강조되어있다.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이 ‘참 믿음’이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이러한 가르침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해가지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행함이 없는 자는 모래 위에다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바울도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는 가르친바 없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거듭 반복하면서도 그 믿음이 행위를 끌어낸다는 말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로마서 8장 13절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를 인용하며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 속의 믿음과 말과 행동의 표현이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유대인을 책망하시기를,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29:13]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바리새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3]라고 하셨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입증되어야 한다. 만일 행위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그의 믿음은 가짜거나, 가짜일 공산이 크다. 지금 우리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행위나 실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쉐인 클레어본의 책 제목처럼,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3) 세상을 위한 교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믿음은 행위를 ‘낳는다’. 그래서 행위를 행실(行實), 혹은 열매라고 부른다. 우리는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았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끼로 찍어 불어 던진다고 했다[마3:10/7:19].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그 열매는 누구를 위한 열매일까? 어떤 이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라고도 할지 모르고, 또 어떤 이는 교회를 위한 열매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매는 세상을 위한 열매다. 나무가 맺은 열매를 나무가 먹지 않듯이 기독교인이 맺은 열매는 기독교인이 먹지 않고 세상이 먹는다. 에스겔서 46장과 요한계시록 22장의 환상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성도는 생명수 강변에 심기운 나무인데, 이 나무가 맺은 나뭇잎과 열매가 세상을 치료하는 약재료요, 열국을 먹이는 양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먹이는 유모요, 세상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이것은 교회의 말이 아니라 행실로 가능하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 존재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먼저 예수님은 교회를 ‘산 위의 동네’라고 하셨다. 이 말은 교회의 삶의 방식이 너무도 탁월하고 두드러져서 광고나 선전을 하지 않아도, 또 아무리 감추고 은폐하려고 해도 도저히 감출 수 없이 세상 가운데 표시가 난다는 의미다. 또 예수님은 기독교인을 ‘빛’이라고 하셨다. 드러나는 교회의 삶의 방식이 너무도 똑바르고 분명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세상에게 바른 길을 가리켜 준다는 의미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교회를 ‘소금’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자와 교회가 세상 부패를 막고, 세상을 거룩하게 하며, 세상으로 하여금 살 맛이 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교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위한 교회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열매가 세상 사람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향한다. 여기서 한 가지 두려운 진실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진짜라고 증언해 주어야 하는 사람은 같은 믿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불신자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만 불신자는 예수님께 신자에 대해 증거한다. 교회는 세상에게 말씀을 증언하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교회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증언한다.
불신자들이 교회의 신앙을 증거한 예는 초대교회의 신앙에 대해서 이교도들이 남긴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오해하였고 비난하였으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가 계속 증가하는 이유가 기독교인들의 삶의 열매 때문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인들의 형제애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친히 장례를 주선하는 등의 선행에 감탄하고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신론자(기독교인)인 갈릴래아 사람들은 자기네 자신의 가난한 이들 이외에 우리네(로마인)의 가난한 이들까지도 부양하고 있소-우리네의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실 분명히 우리들 자신의 보살핌이 모자라는 것이오.” (G. 로핑크)
3.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신자와 교회는 세상을 위한 존재다. 그래서 신자와 교회는 세상에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교회는 이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교회는 세상에게 무책임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가 참 많다. 죄 많은 세상을 향해 ‘말세야, 말세!’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부도덕하고 세속적인 문화를 향해서는 ‘추하다!’며 기피하고, 전도를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서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저주한다. 또 교회를 비판하는 세상을 향해 감히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그들을 경멸한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너무도 교만하며, 너무도 무관심하다. 교회는 세상의 딱한 처지,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비극적인 삶, 마귀에게 사로잡혀 유린당하는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또 세상의 권력과 돈, 영광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진다. 관심 가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관심 갖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관심을 가져서 탈이다. 사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심 가져야 할 부분과 관심을 끊어야 할 부분을 잘 분별하는 분별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이 세대”와 “하나님의 뜻”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 세대는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은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우리는 사랑해야 할 세상과 거부해야 할 세상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세상을 긍정하기
우리는 너무도 자주, 쉽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세상과 세상 문화를 정죄한다. 물론 세상은 병들었고, 부패하였다. 정죄 받아 마땅하며, 정죄 받을 것이고, 또 이미 정죄 받았다. 그러나 신자와 교회가 세상을 부정하기 이전에 먼저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을 부정한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다. 세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다.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훨씬 더 심각하게 부정했다. 유사 이래 수많은 종교와 사상은 세계와 인간, 문화를 부정해 왔다. 그런데 성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성서는 이러한 입장을 반대한다. 성서는 세상을 긍정한다!
가. 세상을 부정하는 가르침
세상을 부정한다는 말은 세계와 인간, 문화를 부정한다는 말이다. 먼저 불교와 힌두교를 살펴보면 세계는 환상 같은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마야(maya)라고 하고, 불교는 무명(無明)이라고 하는데, 이는 현상 세계가 헛되고 부질없는 환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동양적 관점에 따르면 세계는 실제(reality)가 아니라 환상(illusion)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 세계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라고 믿는다. 쉽게 말해서 현혹당하는 것이다. 이 현혹된 의식에서 인생의 슬픔과 고통이 나온다. 세계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참 ‘깨달음’(moksha, 解脫)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플라톤도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세계가 그림자라면 원형은 무엇인가? 플라톤에 의하면 그것은 이데아(Idea), 곧 관념의 세계다. 이들 모두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며 부정한다.
고대 바벨론 창조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헛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혼돈(chaos), 혹은 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조물주가 질서의 세계(cosmos)를 창조하긴 하지만 문제는 이때 창조세계의 재료가 혼돈의 신의 몸뚱아리를 쓴 것이다. 결국 악은 세계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과 슬픔은 질투심 많고 변덕스러운 신으로 말미암는다. 왜 신이 그런 못된 짓을 하는지 설명이 없다. 인생은 원래 그렇게 슬픈 거라고 설명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이 세계는 비극의 장이다. 세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최고의 신 밑에 약간 덜떨어진 일곱 천사들(eon, 에온)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천사가 실수로 물질세계를 창조했다고 한다. 이 천사가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악이다. 또 진화론적 관점에서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현대 과학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부정한다. 이들은 우주란 물질과 에너지의 우연한 활동에 의해 어쩌다가 생긴 것이다. 왜 대폭발이 있었는지, 왜 지구가 만들어졌는지, 왜 생물들이 진화하고, 왜 인간이 생겨났는지 설명이 없다. 어쩌다 보니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무의미하다.
세계에 대한 부정은 인간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대단히 많은 고대의 신화들은 인간을 신들의 노예나 장난감 정도의 하찮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바벨론 창조신화에 따르면 신들의 귀찮은 노동을 대신 시킬 목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 수메르 지역의 창조 신화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은 아눈나키라는 신이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대신 하기위해, 그리고 그의 소화불량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 학자들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는 인간을 땅 바닥에 개미처럼 살면서 더운 줄도, 추운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들을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보잘 것 없는 벌레 같은 존재로 여긴다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를 가진 저주받은 존재로서 영혼은 가련하게도 인간의 몸 속에 갇혀 형벌을 받고 있는 처지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인간을 윤회의 사슬에 사로잡힌 가련한 중생으로 본다. 또 유물론이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물질이나 다름 없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은 자신이 먹는 모든 것이다”고 했다. 이상의 모든 가르침은 공통적으로 인간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부정은 문화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문화에 대한 부정이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며 사는 행위를 악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힌두교와 불교의 전통에서 문화는 무명에 사로잡혀 사는 불쌍한 중생들의 삶의 방식으로서, ‘속세(俗世)’라고 통칭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길을 가려는 수도사들은 먼저 속세를 떠나야만(脫俗) 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문화와 예술의 위대한 창조자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감정적인 것, 육체적인 것을 혐오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혐오하고, 부부 간의 성행위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으며, 육체적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겼다. 또한 육체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 역시 문화에 대한 강한 부정의 성향이 나타나는데 디모데전서 4장 3절에 따르면 이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한편, 진화론에 기초한 문화 진화론은 문화를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로 본다. 이러한 경향은 필요에 따라 문화와 규범을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 모든 가르침은 한결같이 문화를 부정한다.
나. 세상을 긍정하는 성서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위와는 정반대다. 성서는 그 어떤 사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와 인간, 그리고 문화를 긍정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세계 긍정의 웅장한 선포다. 앞서 말했듯이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창조자는 최고신이 아니라 약간 덜떨어진 천사라고 했다.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바벨론 신화에서는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성서에 따르면 창조 이전에 혼돈 같은 것은 없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느9:6] 곧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시요, 만유의 주시다. 성서는 또 하나님이 세계를 견고하고 단단한 물질세계로 지으셨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45:18] 현대 과학은 세계의 기원을 물질과 에너지의 우연한 결합으로 설명하지만 잠언 8장 등에서 분명히 보여주듯 하나님은 지혜와 함께, 그리고 지혜로 더불어 창조하셨다. 창세기는 반복해서 확언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that it was good.)” 세계는 그 자체로 선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하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은 세계에 대해서 부정하는 모든 가르침을 반대한다.
인간 존재를 하찮게 보는 많은 관점들에 대해서도 성서는 반대한다. 성서는 인간 존재를 대단히 특별하게 묘사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천상회의(heavenly council)를 소집하셨다[창1:26]. 이것은 인간 창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둘째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어졌다. 인간에게는 신적 존엄과 권능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닮은꼴이요, 하나님의 모양이며, 하나님의 자녀다. 셋째로,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 위의 통치자로 인정되었다. 유명한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의 통치자요, 정복자며, 왕이다. 이러한 성서의 인간은 신들이 귀찮아하고 거북스러워하는 일들을 떠맡기기 위해 지음 받은 고대 근동 신화의 인간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성서는 인간을 부정하는 모든 가르침을 반대한다.
성서는 인간의 육체(physical body)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긍정한다.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기사에 따르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했다. 인간은 생령(living soul)인데, 생령은 육체와 하나님의 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의 전통과 반대된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인간의 육체성을 긍정하는 대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당황스러워 한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께서 실제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 몸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오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했다.[요이1:7]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은 인간에 대한 긍정이요, 인간 육체에 대한 긍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령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physical body)으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장차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인데,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영이 아니라 “몸(physical)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이상에서 보듯 성서는 인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모든 가르침을 반대한다.
인간 육체성에 대한 긍정은 인간 문화의 긍정으로 나아간다. 본성상 모든 육체적 본능은 악한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성행위를 하는 모든 활동도 긍정된다. 따라서 문화도 아울러 긍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과 그로 인해 생겨난 최초의 가정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불러 친히 주례를 서시며 두 사람을 결혼시키신다.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이것은 결혼과 성(sex)을 반대하는 모든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요, 결혼과 가족 제도를 사회의 산물로 보려는 문화진화론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문화를 긍정하는 성서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또한 부모를 공경하셨고, 아버지를 따라 목수일을 도우셨으며, 모든 유대교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셨다. 예수님은 종종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으나 해탈을 위해 속세를 떠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항상 문화 속에 머무르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은 문화를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모든 가르침에 반대한다.
이상에서 보듯 성서는 세상을 긍정한다. 창조세계를 긍정하고, 인간을 긍정하며, 또한 문화를 긍정한다. 설사 이 세상이 죄로 오염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싫어하셨더라면 세상은 벌써 불타 없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님은 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래서 본훼퍼는 기독교가 성스러운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종교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창조이후 한 번도 세상을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성서를 따라 우리 기독신자와 교회는 세상을 긍정한다.
2) 세상을 거부하기
우리는 세상을 긍정해야 하지만 만일 우리가 세상을 긍정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깨닫지 못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되고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세상에 대한 또 한 가지 태도는 세상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랜 개혁주의적 전통은 세상의 타락 정도를 가리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고 했다. 이것은 넓이 면에서 우주의 전체 영역이 타락했음을 말해주며, 깊이 면에서 하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그리고 십자가 이외의 어떠한 수단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하였음을 의미한다.
세상이 부패하였음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신호는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하나를 골라 그것을 숭배하는 것을 말한다. 우상숭배는 다양하다. 돌이나 나무, 산들을 섬기는 자연물 숭배가 있는가 하면, 곰이나 호랑이, 소와 같은 짐승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도 있고, 또 황제나 임금, 부모나 자식과 같은 사람을 섬기는 우상숭배도 있고, 돈이나 국가와 같은 사회학적 실재(sociological reality)를 섬기는 우상숭배도 있다. 형태나 종류를 떠나 모든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나님만큼 높아져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과 대결하고 경쟁하려는 쿠데타요, 역모다. 신자와 교회는 이러한 쿠데타와 반역행위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거부한다는 말의 의미다.
세상을 거부한 예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이끌고 지극히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님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유혹했다. 기억하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사탄의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 점에 대해서 자크 엘룰도 이런 말을 한다. “모든 것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고, 모든 것이 마귀에게 충성을 나타내 보였으며, 모든 것이 마귀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은 예수님 앞에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고, 다스리고 있으며, 넘겨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딜(deal)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신자와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간과한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은 사탄의 것으로서, 공중 권세 잡은 자(엡2:2)의 다스림 아래 있다. 사탄은 세상의 왕이다(요12:31; 14:30 등)! 그런 사탄이 절 한 번만 까딱하면 예수님께 그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부하셨다. 바로 이 거부가 모든 신자와 교회가 본받아야 할 세상에 대한 거부의 모범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경제의 영역에서 세상을 거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많은 크리스찬들은 사탄이 경제의 영역에 얼마나 심각하게 침투해 들어왔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탈세나 횡령, 뇌물과 같은 불법적 경제 활동만을 사탄적인 경제활동으로 여기며, 경제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자’라는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하는 곳이 벌써 사탄의 강력한 지배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탄이 경제의 영역에 침투함으로 돈이 모든 가치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며, 돈으로 모든 것이 매개되고, 돈의 권능이 전능해져서, 돈의 명령이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명령과 ‘돈을 벌라’는 명령 중 어느 것에 더 복종하겠는가? 이 시대를 바꾸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돈의 흐름이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결혼 연령이 올라가고, 출산률이 저하하는 모든 현상들은 돈의 명령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로버트 라이시(Robert B. Reich)는 현대인을 ‘부유한 노예’라고 했다. 누구의 노예인가? 돈의 노예이다. 맘몬(Mammon)의 종이 되고 있다. 신자와 교회는 경제 영역을 장악하고 있는 맘몬(Mammon)과 그의 체제를 거부해야 한다. 신자와 교회는 하나님만큼 높아진 돈의 권위를 거부하고, 더 이상 돈의 명령에 따르기를 중단해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세상을 거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스탠리 하워와스(Stanley Hquerwas)는 이 문제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엇이 신(神)인가? 부모가 자식까지 기꺼이 바치려고 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신일 것이다. 자식을 바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다. 있다.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오늘날 국가를 위해 자녀를 바치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국가의 명령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날 국가는 하나님을 닮았다. 그래서 국가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다. 국가는 최고의 권능을 가졌다. 전능한 국가는 국민의 삶의 모든 영역을 책임지려 한다. 국가가 책임지는 영역은 공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복지국가’의 이념은 국가가 전 국민의 ‘행복(happiness)’에 대해서까지 책임지게 될 정도로 전능해 졌다는 말이다. 국가는 무소부지(無所不知)하다. 국가는 모든 국민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감시하고 파악한다. 영토 내 모든 산과 강, 돌이나 나무까지 파악하며, 모든 건물과 그 건물의 용도를 알고 있다. 불고지죄(不告知罪), 즉 국가에게 알리지 않는 것도 죄다. 왜 죄인가? 국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국민은 모든 것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 전 영토에 걸쳐 국가는 행정 및 경찰활동으로 존재한다. 외견상 국가를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오늘날 국가는 신성(神聖)해 졌다. 국가는 최고 권위기관으로서 원칙상 국가를 초월하는 개인이나 기관은 존재할 수 없다. 국가는 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한다. 국가의 권위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가 되어 가고 있다. 예컨대, 주민등록은 국가로부터 존재할 자격을 인정받는 절차다. 즉 주민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은 국가로부터 존재의 허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요, 이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학교, 직장, 가정, 여가, 심지어 신앙생활까지 국가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날 국가는 신이 되어 가고 있다. 신자와 교회는 신이 되어가는 국가를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정신은 효율성(efficiency)의 정신이다. 효율성의 정신이란 다른 말로 밀림의 법칙이요, 약육강식의 원칙을 말한다. 효율성이란 무한한 힘(power)의 추구를 의미하며, 이 원리 아래서 힘 이외의 다른 모든 가치는 상대화된다. 효율성의 정신은 생존의 원칙으로서 죽느냐, 사느냐의 양자택일의 원칙이다. 또한 효율성의 정신이란 성장주의와 성공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날 성장과 성공은 절대선으로서 모든 것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효율성이란 목적이나 방향성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관계하는 원리다. 현대 사회에서 목적과 방향성은 사라지고 수단과 방법만 남았다. 그래서 현대인은 “왜?”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만 묻는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더,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현대 사회는 ‘more society’이다. 전속력으로 팽창되고 성장하고 있는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효율성의 독재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효율성의 명령을 거부할 만큼 용감한 사람은 어디 있는가? 이 사회에서 효율성을 거부하는 자는 미친 놈이나 최소한 무식한 놈 취급을 받는다. 불행히도 효율성의 정신, 곧 성공주의와 성장주의는 교회?집어 삼켰다. 교회랑 세상이랑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교회의 성장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세상 정신의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신자와 교회는 효율성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효율성의 정신(spirit)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때로는, 아니 아주 빈번히 비효율적인 영(Spirit)이시다.
문화를 살펴보자. 현대 문화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은 ‘유혹(seduction)’과 ‘중독(addiction)’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유혹’을 현대 사회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했다. 과거에 유혹은 여성의 전유물이었으나 오늘날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유혹한다. 외모지상주의(lookism)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거울 앞에다 끌어 앉혀 유혹의 기술을 연마하게 한다. 기업도 고객을 유혹해야 살아남는다. 기업의 광고는 그 자체로 최고의 유혹 기술이다. 정치인도 유권자를 유혹한다. 이미지 시대에서 정치는 점차 유혹하는 기술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유혹 사회’다. 유혹 사회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유혹한다. 사람들이 이처럼 유혹자로 내몰리는 이유는 자신을 판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판매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 능력, 개성, 명성을 한껏 PR하여 스카웃과 트레이드를 노린다. 미니홈피, 블로그, UCC 등은 유혹 사회의 징후다. 유혹 사회에서 교회도 유혹한다. 교회는 건물, 프로그램, 커피숍, 문화공간, 감동적인 종교 체험 등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일단 유혹하였으면 그 다음은 ‘중독’(addiction)시켜야 한다. 수많은 케이블 TV 채널은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채널고정!(stay tuned)’을 소리친다. TV 연속극의 기본 공식은 다음 회를 꼭 보게 만드는 것이다. 시청자를 확보하는 것 못지않게 시청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온갖 회원증과 카드의 발급, 다양한 특혜 제공도 한 번 고객을 단골로 붙들어두려는 안간힘이다. 점차 막강해지는 브랜드 파워(brand power)란 사실 충성스러운, 그리하여 브랜드에 중독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중독 사회가 도래하였다. 중독이란 최고의 마케팅 기법이 되고 있다. TV, 인터넷, 게임, 포르노, 음식, 알콜, 흡연, 각종 레저스포츠 등 각종 상품들은 점점 더 소비자를 중독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여기에 종교중독까지.. 기독신자와 교회는 오늘날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온 유혹과 중독의 정신을 거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을 노예화시키려는 사탄의 수작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중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을 긍정하면서도 세상을 부정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우리 기독신자와 교회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책 제목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라고 정했는데 참 잘 정한 것 같다. 쉐퍼의 질문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찬들의 질문이 틈構渼째?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도피주의(Escapism)적 대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대안은 세상에서 도망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해답으로 생각한 사람들로는 에쎄네 공동체나 쿰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보다 순수한 신앙의 유지를 위해서 기존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을 택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침례/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이러한 에쎄네 혹은 쿰란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3장은 요한이 상당히 도피적인 생활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도피적 전통은 4세기경 성 안토니우스에게도 보이는 데 그는 10대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을 모두 팔아 구제하고 동굴, 광야,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광야나 산 속으로 나가지는 않고 집 근처에 기둥을 높이 세워 하루 종일 기둥 위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며 수도했다. 기둥 위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주상성자(柱上聖者)라고 불렀다. 이런 식의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수도원 전통이나 기도원 운동, 또 여러 은둔주의 운동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도피주의 말고도 세상 안에 있으면서 도피적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옛날 터툴리안이라는 교부는 “아덴(문화의 도시)과 예루살렘(영적 도시)이 무슨 상관이 있느뇨?”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을 바꿔 “세상과 교회는 무슨 상관이 있느뇨?”라며 세상일에는 일절 담 쌓고 밤낮 교회에서 기도하고 말씀만 보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성가 중에서도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라는 노래가 있었다. 오로지 죽어서 천국 들어갈 생각만 하고 이 세상은 억지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신앙을 노래한 것인데, 전형적인 도피주의적 신앙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 속에서 도피주의적 대안이 종종 긍정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서가 보여주는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도피주의적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항상 세상 속에 머무셨고, 죄인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다.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고,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할 때 즉시 도와주셨으며,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아시고 먹을 것을 예비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을 따라 신자와 교회는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문제들, 세상이 당하는 슬픔과 고통, 곤경에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2) 기독교화(Christianizing)의 대안
세상에서 도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세상을 기독교화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같은 교부들은 ‘일자(一者)’라는 철학적 개념을 성서의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하려 했다. 피터 아벨라르드, 토마스 제퍼슨, 라이프니쯔나 칸트 등도 성서의 가르침을 철학화하려고 했다. 리츨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성인군자처럼 여겼다. 정치적으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고, 교회는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포했다. 로마를 기독교화하려고 한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선포하고 성시화(聖市化)하려고 했다. 월터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운동도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 경제, 기독교 정치, 기독교 학문,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모두는 세상을 기독교화하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상을 기독교화하려는 시도는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대안이 못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주님은 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빌라도가 싸움을 걸어오지만 예수님은 무시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섞이지 않고, 또 싸울 일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고 세상 나라는 일시적이다. 이 두 영역은 절대로 동일시될 수 없다.
사실 기독교화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하자마자 로마는 이민족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 운동도 실패했고, 사회복음운동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기독교화의 시도가 실패할 때 생기는 부작용 중 하나는 세상 나라의 붕괴를 기독교의 붕괴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무너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고, 기독교도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소위 기독교기업이 부도가 날 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기독교화하려고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내용이 변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뒤 복음이 어떻게 지배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또 제네바 성시화 운동의 결과 복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율법으로 변질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국가가 군주제, 공화제, 민주제, 공산주의로 바뀔 때마다 교회는 그 제도가 하나님이 내리신 제도라고 선전했는데 이것은 교회가 세상의 포로로 전락했다는 증거만 남긴다. 최근 기독교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 운동은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세상 기준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쟁력 있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기독교 문화 운동은 성공하지 못하며, 경쟁력을 갖춘 문화를 만드는 순간 세상 문화랑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독교화하려는 대안은 바른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3) 나그네(Resident Alien)의 대안
도피주의와 기독교화는 모두 권장할 만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또 하나의 대안이 있으니 그것은 ‘나그네의 대안’이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와 교회를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보면 나그네는 이방인(stranger)이고 행인은 순례자(pilgrim)다. 즉 신자와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이방인으로, 혹은 순례자나 여행객으로 사는 자들이다. 스탠리 하워와스는 이런 신자와 교회를 ‘레지던트 에이리언(Resident Aliens)’, 즉 재류 외국인, 혹은 해외 여행자라고 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산다. 그러나 나그네는 오로지 죽어서 천국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천국 입국 대기자가 아니다. 나그네는 세상을 위한 나그네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파송하셨다. “갈지어다!”[눅10:3] 무엇 하라고 보내시는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라고? 아니다. 그들 앞에서 살라고 보내셨다. 낯선 자들로, 이상한 자들로, 구별된 자들로 그들 가운데(!) 살라고 보내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보다 참된 삶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라고 보내셨다. 이것이 나그네의 의미다. 나그네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삶의 원리들을 살펴보자.
가. 신앙
첫 번째 원리는 믿음이다. 오늘날 신자와 교회의 행실은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많은 크리스찬들이 신자와 교회의 열매 없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분노,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느끼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확실히 오늘날의 크리스찬에게 행함과 실천은 부족하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그러나 실천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천부터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매스컴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회를 열고, 캠페인을 벌이고, 행동강령을 만들어 뿌리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단체를 만들고, 세미나를 열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들도 근본적인 치료책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주의(activism)로는 병의 증상만을 고칠 뿐이다. 교회가 실천이 부족한 것은 병의 증상이지 병의 원인이 아니다. 병의 원인은 믿음의 부족, 정확히 말해서 ‘진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대안은 오직 믿음뿐이다(Sola Fide)!
믿음이란 새로운 의식을 말한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이 새로운 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보이는 것(fact)보다 보이지 않는 것(truth)이 더 근원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보이는 사실만 믿고, 보이지 않는 진리는 믿지 않으려 한다. 자크 엘룰은 이것을 사실 숭배라고 했다.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뉴스와 시사를 신뢰한다. 현대인의 머리 속에는 온갖 단편적인 뉴스와 시사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계를 보려한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지 속에 자신의 실상을 감추고 있다. 현대인은 안개 같은 이미지와 분위기, 느낌과 간지 속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환상이요, 거짓이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거짓 환상을 만들어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모든 기만과 환상을 걷어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은 현실에 눈을 감고 진실에 눈을 뜨는 행위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가 가나안 땅의 객으로 지내고 있는 상황은 사실(fact)이었지만 그 땅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truth)였다. 아브라함은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믿었고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도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나그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다.
나. 하나님 나라
두 번째로, 나그네로서 신자와 교회는 자신의 본적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본적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다른 말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천국을 한숨과 눈물이 없는 곳, 아름답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물론 천국은 그런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최소한 두 가지 오해가 만들어진다. 하나는 천국이란 이 땅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으며 죽은 뒤에만 갈 수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을 마치 놀이동산이나 테마파크 같은 어떤 ‘장소’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천국을 죽어서 가는 장소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이 이미 자신들의 공동체 가운데 임하였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도 예수님의 재림과 육체의 부활 이후 보다 온전한 천국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하지만 천국은 죽은 뒤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 가운데로 돌입해 들어온 나라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확증된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천국이 예수님과 함께 벌써 임했다는 말씀이다. 만일 천국이 임했다면 어떤 식으로 임했다는 말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눅17:20] 그렇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실재(spiritual reality)다. 어떤 실재인가? 천국은 하나님의 왕권, 즉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다. 천국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초대교회는 자신들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었고 그래서 자신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믿은 것이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범죄 이후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의 자리에서 축출당하고 사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은 사탄의 왕국이요 사탄은 이 세상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사탄에게 내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찬탈해 간 이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 오셨으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 왕국을 붕괴시키셨다. 사탄 왕국의 붕괴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본격적으로 이 땅에 돌입해 들어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몰고 오신 천국은 성령 강림과 함께 이제 교회 안에 임하게 되었다. 물론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은 교회 안에 임한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통한 입교를 마치 국적을 옮기는 귀화행위처럼 여겼다. 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짐과 동시에 이 세상 나라도 더 이상 그들의 조국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속해있던 나라를 ‘타향’이라고 불렀다. 예컨대, 로마 교회는 스스로를 가리켜, “로마에서 타향에 사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또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서 타향에 사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탠리 하워와스가 자주 강조하는 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초대교회가 하나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른 나라의 ‘국민’으로 여겼다. 이들은 그들의 지배자인 로마황제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만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정치집단이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리고 로마황제를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형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로마제국의 관리요원으로 잠시 세우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태도는 황제와 로마인들을 무척 당황스럽게 했다.
교회가 스스로를 천국의 국민으로 여길 때 불가피하게 교회는 사회적, 정치적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교회가 총과 칼로 무장하여 세상 나라와 대결하는 정치적 집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가 입교를 일종의 귀화행위처럼 여겼을 때,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국민’으로 여겼을 때 초대교회의 믿음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제숭배에 대한 거부였다. 로마 제국민들은 로마와 황제에게 “가이사는 주(主)이시다”는 충성서약을 해야 했는데, 초대교회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의 충성서약은 그리스도께만 돌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만 주(主)이시다”고 고백했을 때 이들은 총칼로 로마제국에 맞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로마제국의 권세를 거부하고 있었다. 믿음이 실제라면 그 믿음은 불가피하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피해야 할 함정 중 하나는 ‘영적’인 것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려는 시도다. 이것은 ‘영적인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혼돈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신령(?)해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물질을 부정하고 영혼만 인정하는 영지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말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믿음이란 일종의 국적 이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통령으로 모시는 국가의 국민이다. 천국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우리는 그리스도께만 충성서약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서약을 올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충성서약을 철회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대한민국을 조국(Fatherland)!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국가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따라서 우리가 최대한 협조해야 할 기관이라는 사실은 믿지만, 목岵?바쳐 충성해야 할 국가로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돈에 대해서, 효율성의 정신에 대해서, 문화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를 재정의해야 한다. 오늘도 주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명을 찾으신다.
다. 공동체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은 교회 안에 임한다. 그렇다면 천국은 교회 안에 어떻게 임하는가? 종종 교회는 천국이 신자 각자의 마음 속에 임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심령천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심령천국은 개인적인 것이고, 또 심리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자크 엘룰 말대로 ‘행복한 저능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천국은 개인의 마음 속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공동의 믿음’ 안에 임한다. 공동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이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이들은 ‘한 믿음’에 참여한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세례도 하나이요”[엡4:5] 믿음은 하나다! 신약성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교회의 믿음’이다. 바로 이 공동의 믿음 가운데 천국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이 된 천국 앞에 음부의 권세는 두려워 떤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가 못하다.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에서 가톨릭은 교회를 절대화하였고, 개신교는 신앙을 절대화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교회의 절대화란 교회 제도의 절대화를 의미하고, 신앙의 절대화란 개인 신앙의 절대화를 의미한다. ‘오직 믿음(Sola Fidei)으로’라는 기치 아래 탄생한 개신교회는 점차 개인의 신앙을 강조했다. 오늘날 신앙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요즘 신자들은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는 신앙이 좋고, 누구는 신앙이 별로라고 말한다. 오늘날 신앙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신앙이 여러 개가 되었으니 교회도 다 따로따로다. 모든 교회는 원칙상 따로 존재한다. 전 교회는 ‘개교회화’되었다. 교회 안의 신자들도 다 따로따로다. 전 신자는 ‘개신자화’(?)되었다. 교회는 모래알 같은 신자들이 각자의 종교적 유익을 위해 잠깐 한 곳에 모여 종교 프로그램을 만끽하고 뿔뿔히 흩어지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 가운데 천국은 임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스탠리 하워와스는 구원이란 사생활(privacy)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했다. 침례/세례는 자기 개인의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교회에 들어온다는 의미는 한 몸의 수족(手足)이 되어 접합된다는 의미다. 한 몸으로 연합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불러주는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실제로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이 이교도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한 이교도는 이렇게 말했다. “무차별하게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군요.” 가족으로 서로를 받아들인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여겼다.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고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교회가 부양하는 책임을 기꺼이 졌다. 교회 안에서 개인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연합의 공동체 가운데 천국이 임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형제자매의 공동체라는 의미는 교회 안에서 모든 계층과 계급이 붕괴된다는 의미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 선생, 아버지, 지도자도 없어야 한다고 하셨다. 교회 안에는 오직 형제자매만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형제자매의 공동체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혁명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대교회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노예나 그 노예의 주인이 다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불렀는데 당시 교양인들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06년 LA 아주사 거리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한 예배당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당시 미국사회를 얼마나 분노케 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도 아버지나 아들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여 상놈들의 무군부부지교(無君無父之敎)라고 멸시했다. 교회가 형제자매의 공동체라는 의미는 국회의원, 대통령, CEO, 노숙자, 알콜 중독자, 전과자, 목사,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완전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다. 이것은 교회 내의 모든 계급과 서열, 특권이 사라진다는 의미요, 지배와 통제가 사라진다는 의미요, 또한 상명하달식 의사소통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이러한 형제자매 공동체는 사회 가운데 변혁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라. 아가페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에서 모세의 계명을 대신할만한 ‘새 계명’을 선포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13:34]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랑해야 할 상대가 이방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라는 사실이다. “서로(ἀλλήλων)”라 함은 신자들끼리를 말한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아 볼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만일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무관심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 고소, 고발, 스캔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도 자주 일어나서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이러고서야 어찌 교회가 세상을 변혁하겠는가?
사랑이란 아가페(ἀγάπη)의 사랑을 말한다. 요한은 이 아가페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요일4:7]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말하고 듣고 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닌 것이다. 사실 요즘만큼 사랑을 많이 말했던 때도 없었을 것이다. TV 드라마, 가요, 영화, 뮤직비디오, 소설 등 맨날 사랑타령이다. 요즘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잘도 한다. 백화점 점원도, 114 안내원도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한다. 간판이나 스티커, 티셔츠 로고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난무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빈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이 빈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교회 간판이나, 교회봉고차 뒷범퍼, 십자가 목걸이, 귀걸이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가 써있다. 특히 예배 시간에 옆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할 때 그 어색함으로서의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가 아니다.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 말이다. 성경은 이런 빈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를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아가페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와 십자가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아가페는 그 어떤 논리나 변증, 신학보다 기독교를 강하게 변증할 수 있었다. 아리스티데스, 이그나티우스, 터툴리안, 미누치우스 펠릭스 등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이교도를 향해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교도는 침묵했다. 그들도 교회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아가페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었다. 교회의 아가페는 모든 집단과 민족,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원수와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그런 아가페였다. 그래서 교회의 아가페는 불신 세상에게까지 나아갔다. 교회의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아가페였다. AD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가 있었다. 그곳 감독 디오니시우스의 편지에 의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환자를 내버리고 도망하여 길거리에는 시체들이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 사람들은 흑사병이 걸린 교인들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정성들여 세심하게 간호했다. 시중을 들다가 흑사병이 전염되면 또 다른 교인이 다가와 그를 사랑과 친절로 간호해 주었고, 다시 그에게 흑사병이 옮겨지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간호해 주었다고 한다.
사제들도, 부제들도, 평신자들도... 그들은 성도들의 몸을 품에 안아 눈을 감겨 주고 입을 닫아주며 어깨에 메고 가서 진심으로 얼싸안고 몸을 씻기며 옷을 입힌 다음 장례를 치렀기에, 그들도 얼마 안가서 똑같은 시중을 입게 되었으니, 이때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또 언제나 먼저 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꺼이 나섰던 것입니다.(G. 로핑크)
7. 마치는 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말씀에 의하면 신자와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서 부름 받아 나온 이들이다. 신자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국가며,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다. 신자와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 중간에 서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덕을 비추고 몸소 실천해 보이고 선전하는 자들이다. 신자와 교회는 세상에 대한 ‘대조사회’요, 대안을 제시하는 ‘대안사회’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대조사회와 대안사회로 존재할 때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치유하고, 먹이고,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초대교회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구가하던 위대한 제국, 로마에 대해서 대안사회로 존재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로마를 치유하고, 먹이고, 돌볼 수 있었다. 이러한 신자와 교회에 대해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한 편지의 글을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언어, 혹은 전통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만 거주하는 자신들만의 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특별한 말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특별한 삶의 방식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와 비그리스 지역의 도시에 거하면서 그 고장의 옷이나 음식, 그리고 삶의 양식을 철저히 따른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 방침은 존경할 만하며 탁월하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고장에 살지만 그러나 나그네로 살아간다. 그들은 시민으로써 모든 영역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서도 외국인으로써 모든 것들을 견딘다. 모든 외국은 그들의 고향이며 모든 고향은 그들에게 외국과 같다... 마치 몸 속의 영혼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존재한다. 영혼이 각 지체 전체에 펴져 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계 곳곳의 도시에 퍼져서 산다. 영혼이 몸 속에 거하지만 몸의 한 부분이나 지체가 아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부분이나 일부가 아니다.(Michael Warren)
<토론과제>
1.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2. 야고보서가 말하는 참 믿음을 자신이나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자. 만일 부족한 점이 있다면 대안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3. 세상을 긍정한다는 말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4.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거부해야 할 세상의 영역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 보자.
5. 어떤 식의 신앙생활이 도피주의적 신앙일까?
6. 기독교화하려는 노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7.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참고도서>
Jacques Ellul,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안양: 대장간.
Jacques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안양: 대장간.
Richard Middleton & Brian Walsh, 「그리스도인의 비전」, 서울: IVP.
Richard Middleton & Brian Walsh,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서울: 살림
Stanley Hauerwas & William Willimon,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서울: 복있는사람.
Stanley Hauerwas & William Willimon, Resident Aliens, Nashiville: Abingdon.
Ge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서울: 분도.
Paul Ricoeur, 「악의 상징」, 서울: 문학과지성사.
출처: 나들목 교회, 열린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