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6. 13:12

미하엘 엔데의 '모모' --- 김선규 님

[미하일 엔데] 모모

Category :: 영화, 책/책


시간이 항상 모자란 우리에게 들려주는
모모의
시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끝없는 이야기와 짐 크노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였던 것도 같다. 엔데의 소설들을 보고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싶어 하고, 나도 짐처럼 원래 왕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을 보면, 중학생보다는 국민학생에 가깝지 않았을까? 최소한 정신연령에서는 그렇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예전에 내가 어렸을 적에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지금 내 기억 속에는 당시 최대의 특수효과라고 선전하던 것과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큰 종처럼 맑은 울음소리를 내는” 커다란 흰 용의 모습만 남아있다. 나는 영화는 보지 못하고 당시 문고판으로 나왔던 책을 통해서 “끝없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나도 그런 책을,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 했다. 짐 크노프도 그즈음에 만나게 되었다. 사방이 몇 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에 살고 있는 까만 소년 짐도 “끝없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나를 매료시켰다.

미하일 엔데라는 이름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ABE”라는 이름으로 나온 전집류였는데, 주옥같은 소설들이 엄청나게 많이 실려 있었다. 지금은 안 보이는 걸 보니 출판사가 망했거나, 이 시리즈가 망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이 시리즈로 읽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훌륭한 시리즈가 왜 망한 걸까? 어쨌든, 그때에는 반지의 제왕이 끝없는 산, 끝없는 강 이런 시리즈로 되어 있었고, 호비트 이야기까지 총 7권인가 8권으로 되어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정말 “끝없이” 긴 이야기였다. 이 명작 시리즈에 “모모”가 있었다. 순전히 미하일 엔데의 이름을 보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언제나 정말 소중하고, 정말 아름답고, 정말 귀중한 것들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모모”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 느낌은 그저 재미있는 상상력이구나 정도였다. 아마도 시간에 대한, 인생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과 모모
갑자기 회사에서, 주변에서, 서점에서 “모모”가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모모”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나는 얼마 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기 드라마에서 “모모”가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누가 나오는지는 전혀 몰랐다. 우리를 시간에 쫓기게 하는 원흉 중에 하나인 텔레비전이 시간을 찾으려는 “모모”를 소개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모모”가 “모모”에서 그토록 열심히 뛰어다닌 이유는 빼앗긴 시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도 무척이나 시간을 아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시간표를 적어 넣고, 누구누구의 시간 관리법이니 아침형 인간이니 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토록 시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돈을 더 많이 벌어서 행복을 사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작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데 말이다. 시간을 저금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 이야기
시간은 우리에게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어서 이 시간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모모”에서 엔데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의 난제였던 시간을 너무나 환상적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풀어낸다. ‘언제나 없는 거리’와 ‘아무 데도 없는 집’, 그리고 그 이름도 어려운 ‘세쿤두스 미누티우르 호라 박사’, 귀여운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모모”가 경험한 환상적인 “시간”까지. 우리는 엔데의 상상력을 통해서 시간에 대해서 약간은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지금부터 1,500년 전에 어거스틴은 시간에 관한 날카로운 정말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고백록”을 읽어보면, 그는 정말 시간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과연 우리가 ‘현재’, ‘미래’, ‘과거’라고 구분하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는 그의 “고백록”을 보면서 그의 천재성을, 인간 이성의 날카로움을 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모”에서 엔데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 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엔데를 통해서 시간에 대한 통찰력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모모”가 들려주는 시간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모모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호라 박사님, 전 정말 몰랐어요. 모든 사람의 시간이 그렇게...”
모모는 적당한 말을 찾으려 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위대하다는 걸요.”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난 정말 몰랐다. “모모”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인줄을 말이다.

- 알라딘에서 북 리뷰 이벤트를 하더군요.
백수니 책 값이라도 벌자하고 쓴 글입니다.
그냥 끌려서 다시 읽게 되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네요.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느끼나 봅니다. 예전에는 별 감응이 없었는데..
2008. 9. 16. 13:09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 --- 김선규 님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Category :: 영화, 책/책


누군지 기억은 안나지만 몇 년 전에 누군가가 준 책이다.
그 때는 그냥 그저 그렇게 읽었는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참 좋다..

이 책을 쓰신 피에르 신부님은 프랑스 사람인데, 프랑스에서 매년 하는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을 뽑는 투표에서 7번이나 1등을 하셨다고 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19살에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셨다. 나치 치하에서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셨고, 그 후에는 모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하시던 분이시다.
이 책은 그 분의 삶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주 좋다.
그 분의 삶이 참 본받을만하고, 그 분의 신학은 이해하기 쉽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복음의 본질을 잘 설명하고 있다.

총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면,

1부 상처입은 독수리들
상처입은 독수리들은 우리 인간을 의미한다. 저 높은 창공을 날고 싶어하고 날 수 있지만, 상처때문에 날지 못하는 독수리들. 그것이 피에르 신부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팡세에서 파스칼이 말한 쫒겨난 왕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 이 장에서는 피에르 신부님이 시작한 엠마우스 운동과 여러 상처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리고 아무런 희망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확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 복음 등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피에르 신부님의 생각들이 담겨있는 장이다.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딱딱한 신학을 참 알기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 나라의 많은 교회에서는 펄쩍 뛸만큼 과격한 내용도 있다. 교회 밖의 구원이라던가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 속죄론 같은 것에 대한 부정 등. (사실 한국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여러 가지 신앙은 지극히 편협하고, 전 세계 기독교회의 입장과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주 소수파 중에 하나이다.) 이 장과 다음 장에는 정말 너무나 주옥같은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몇 구절만 살펴보자.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성 프랑체스코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국가의 원수이건, 회사의 우두머리이건, 또는 노동조합 책임자이건, 교사이건,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라고 자문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렇게 자문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또, 우라가 그동안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에 대한 대속에 대한 생각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보통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했으니, 그 잘못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말이다. 그런데 피에르 신부는 그리스도가 값을 지불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하니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도둑질한 것이다. 이 책에서대로라면 하나님이라는 전원으로부터 코드를 뽑아버린 로보트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속이란 도둑맞은 자가 도둑이 벌을 받는 걸 바라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사랑으로 도둑이 훔친 것을 되돌려주도록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그리스도를 말한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전원이 차단되어 실의에 빠진 인간에게 사랑하는 능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다."

참 공감이 되는 설명이다. 나도 피에르 신부처럼 오랫동안 전통적인 대속에 대한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근래 계속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보여준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받은만큼, 아니 가급적 더 많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주길 원한다.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미움에는 더 큰 미움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보여준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가장 높은 분이지만 가장 낮아지는 것. 나는 나의 이런 이해와 피에르 신부님의 견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뭐.. 어떤 사람들은 이단 하나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3부 만남을 향하여
3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어떤 책임을 지는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중에서 기도에 대한 구절이 나의 관심을 특히 끈다. 나는 예전부터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해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취향때문이다. 나는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이 잘 맞지 않을 뿐이다.) 그 구절을 옮겨보면,

"사실 끊임없는 기도의 은밀한 상태 속에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모든 간청들이 우리에게 깃들여 있으므로, 그 간청들을 큰 목소리로 소리내어 표현할 필요는 없다. 소리내어 하는 기도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또,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참 마음에 와 닿는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하느님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다. 우리의 잘못이 어떠한 것이든 그분의 용서는 언제나 주어진다.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같다. 항국적인 용서의 상태인 것이다. 용서란 하느님의 모성적 면모인 셈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의 아이를 용서한다."


요즘들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한 그림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 다같이 조금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것. 지금 내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저런 모습이 되기를 소망한다.
2008. 9. 16. 13:02

우리 문화와 사대문 --- 김선규 님

우리 문화와 사대문

Category :: 생각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저는 TOEFL학원을 다닙니다.
네 과목을 듣는 종합반인데, Reading과 Listening은 매일 수업이 있고,
Grammer하고 Writing은 격일로 수업이 있지요.

이 수업들 중에서 Listening 수업의 선생님은 우리 나라, 현재 정치, 사회 문제 등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수업시간 마다, 광우병이니 명박이 아저씨니 하는 얘기를 하거든요. 오늘은 숭례문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움을 강조하시더군요. 사실, 우리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우리 문화 킹왕짱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랑스러움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크기로 하자니 자금성이나 베르사유 궁전에 안되고, 오래된 걸로 얘기하자니, 중동에 있는 애들한테 안되고, 우린 그래도 조낸 아릅답다라고 주장하자니 객관적인 기준이 없고, 이러니 마음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한데 표현하기는 힘든 상황이 되는 것이죠.

사실 이게 당연한 일입니다. 볼 줄을 모르니 설명을 할 수가 없는거죠. 우리 문화는 은근한 멋이 특징입니다. 내가 열 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그 중 하나, 두 개만 툭 하고 꺼내놓는 식입니다. 그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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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고 뒤를 알아맞출 수 있어야 비로서 인정을 해주는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돈이 궁하니 돈 좀 꿔달라는 편지입니다. 사실 도도한 양반이 돈 빌려달라기 쉽지 않은데 박지원은 (이 그림이 이 분 초상입니다. 보시면 바로 성격 아시겠죠?)
돈만 꿔달라고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낼 때 술도 한 병 같이 보내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친구는 술은 빼고 돈만 보내면서 이렇게 답을 합니다. "세상에 양주의 학이란 없는 법이지요"

바로 요게 묘미입니다. 이 친구가 말한 "양주의 학"이 뭔지를 알아야 수준있는 대화가 되는겁니다. "양주의 학"은 유래가 이렇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서로 소원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돈을 벌기를 원하고, 어떤 이는 양주의 지사가 되기를 원하고 (양주는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 중에 하나지요, 운하가 있어서 뒷돈도 많이 들어오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 친구는 요즘 말로 하자면 서울 시장 하고 싶다는 얘기지요), 또 어떤 이는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 (신선이 되고 싶단 얘기겠죠?)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친구가 말하길, 난 10만관의 돈을 허리에 차고, 학에 올라 앉아 양주의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얘기를 합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주의 학이란 세상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돈은 꿔줄테니 술은 다음에 마셔라란 뜻이 되는 거지요.

숭례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숭례문은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그 아름다움보다는 그 뜻이 더 멋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사대문은 동양적인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데, 그 숨은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선조들의 멋스러움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동양에서, 특히 유교적인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이상은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이걸 일컬어 '오상(五常)이라고 합니다. 흔히 얘기하는 '仁', '義', '禮', '知', '信' 이지요, 이걸 조금 더 확대시키면, 캡핀 플레닛의 나무, 쇠, 불, 물, 흙이 되고, 푸른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 누런색이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걸 가지고 우리 나라의 사대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흥인문(興仁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짊을 나타내는 문입니다. 방위상으로는 동쪽이고, 색깔은 청색이며, 계절로는 봄이 되닙니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자면 어린 아이의 시절이죠. 그럼 왜 동대문을 어짊을 일으키는 문이라고 했을까요? 봄이 되면 모든 생명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10달의 기다림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어질다라는 것은 보살핌을 나타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살핌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물의 소생을 보살핀다는 뜻에서 어짊을 일으킨다라고 한 것입니다. 봄의 가장 특징적인 색은 그래서 청색이고, 오행상으로는 나무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천지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수풀이 무성해지고, 풀들은 꽃을 피우고, 온갖 곤충들이 애벌레에서 성체로 변합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청소년기로 들어섭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매일 요즘 애들 욕하는 이유가 뭡니까? 개념없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 말고는 모든 천지만물이 개념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나무와 풀과 동물과 곤충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성장하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라야 할 만큼 자라고, 제 때에 태어나고, 제 때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를 숭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 안에 힘이 가득하기 때문에 계절로는 여름이고, 가장 에너지가 많은 남쪽이 그 방위이고, 뜨거움을 상징하는 불과 어울립니다. 당연히 어울리는 색은 붉은 색이지요.

가을이 되면 자신이 봄, 여름 동안 한 일을 가지고 평가를 받습니다. 가을은 평가의 계절이고, 옳고 그름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합니다. 의로움을 도탑게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직 이 나이가 안되봐서 잘은 모르지만, 인생의 가을, 즉 중년이 되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의로움, 옮고 그름을 가리는 냉철함이 아닐까합니다. 그 전에는 사실 뭔가 부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기 쉽지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되고 힘이 있어야 비로서 딴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방위로는 서쪽이고, 색은 희며, 오행 중에는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쇠와 연결이 됩니다.

겨울은 내년 봄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대비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겨울을 상징하는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고 합니다. 지식이 넓어지는 문이라고 한 것인 이때 비로서 인생의 모든 시기를 거쳐 비로서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사물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뜻하는 물과 어울리고, 깊음을 뜻하는 검은색과 짝이됩니다. 방위는 북쪽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자리에는 '信'이 오게 됩니다. 사계절이 수천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심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오행 중에는 가장 근본인 땅에 해당이 되고, 누른색이 이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황제만이 누른색옷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의 근본을 상징하는 황제만이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런 상징성때문에, 사대문 중앙에 바로 보신각(普信閣)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문화는 그 이면을 이해해야만, 그 상징성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겠습니까? 우리 문화를 존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문화를 존중하겠습니까? 좀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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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16. 12:58

예수의 정치학 --- 김선규 님

존 하워드 요더] 예수의 정치학

Category :: 영화, 책/책


교회에서 책 바자회를 할 때 산 책입니다.
예수의 정치학, 일단 제목이 날 끌었고, 가격까지 참해 바로 질러 버렸습니다. (양장본인데 단돈 2,000원, 게다가 원래 주인이 나처럼 책을 보는 스타일인지 누군가 읽었다는 표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ㅋ)
이번에 미국 여행가면서 쉬면서 읽어보자고 들고 갔는데, 실제로 가서는 노느라 못 읽고 조낸 지루했던 오는 비행기 안에서 몽롱함과 짜증과 배고픔과 불편함을 참으며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존 하워드 요더는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매노나이트계의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 매노나이트라는 교파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신학계에서는 아주 유명하죠) 매노나이트는 쉽게 말하면 재세례파이고, (그 중 가장 큰 분파이다) 재세례파는 쉽게 설명하면 종교개혁 당시 등장했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세례만 인정하는 분파입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 유아세례를 받은 성인들에게 다시 세례를 줬기 때문에 재(再)세례파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세례를 또 주는게 뭐가 대수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재세례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커다란 특징이었죠. 게다가, 이 재세례파는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비폭력을 추구하는 매우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더욱 다른 사람들 눈에 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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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우리 요더 선생님도 (요더 선생님하니까 오른쪽의 이 분이 생각나는군요. --;)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런 사상이 어떤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파한 책이 바로 "예수의 정치학"입니다. 전 왜 늘 글을 쓰면 이렇게 앞부분이 쓰잘데기없이 길어지는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예수의 정치학은 기독교의 윤리학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노예제도, 성차별, 폭력사용의 범위, 사형제도 등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근거가 성경에 있는가가 바로 그 물음이죠. 물론 요더 선상님의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 썼겠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저런 얘기 없잖아요? 게다가 있다고 해서 매우 보수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는거 같고,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왔구요. (그래서 요즘 우리 미욱한 백성을 선도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우리 지도층 여러분들께서 교회를 참 좋아하시나봐요) 문제는 이 두 가지 입장이 (성경의 윤리학은 보수적이다와 성경과 윤리학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입장) 우리 요더 선생님과 한 배를 탈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요더 선생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선생님의 주장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합니다. (이 부분이 약간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이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해석하고보니 이런 입장이 나왔다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이렇게 어떤 입장이다라고 할 수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런 경향이 보인다 정도로 보시는게 좋을 듯 하네요) 성경의 정치적 해석이 바로 그 방법이죠. 이제 왜 윤리학에 대한 질문은 던지면서 책 제목이 정치학인지 이해가 가시죠?

이 분은 예수님은 매우 정치적으로 움직이셨고, 결국 정치적인 반대에 의해, 정치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주장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도 충분히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이 분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바울 선생에게 흔히 하는 비판 중 하나가 노예제도와 여성차별입니다. 요서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 상황은 이렇습니다. 사실 노예와 여자는 당시 "인간"으로 취급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통 모인 사람의 숫자를 셀 때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되지 않지요. 그런데 예수의 복음이 이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이들은 비로서 자신이 처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사상화 된거지요. 즉, 자신도 자유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존엄한 인간임을 깨닿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선생은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노예와 여자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당연한 거니까요.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그 동안 별 생각없이 보던 성경 본문을 한꺼플 열어 준 셈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더 선생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본문들,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본문들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묶어 예수의 정치학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 결론을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요건 스킵.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해석학부터 기독교인과 정치, 성경과 윤리 등 많은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매우 고마운 일이지요. 반면에 좀 거시기했던 점은, 이 분의 성경 해석이 너무 연역적이지 않나 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원래 생각은 이렇다 (이 이렇다라는 생각이 결국 매노나이트적인 생각이죠)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여기에 성경본문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단 말이죠. 물론 이 분의 성경해석은 무척이나 탁월해서 (이 분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그 유명한 칼 바르트입니다. 후덜덜하죠) 아마츄어인 저는 감히 반박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뭐랄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거죠. 결국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은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겁니다. 뭘 좀 알아야 책을 봐도 이해를 하고, 적용을 하죠. 좋은 책을 읽어도 가슴이 답답한게 아리송하기만 하니...

한 줄로 요약하자면, 좋은 책이라는 겁니다. 성경해석이나,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치행동 등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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