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21. 13:18
탈북자수기 - 북한은 왜 가난할까?
2011. 6. 21. 13:18 in 자녀교육/유용한 학습자료
북한은 왜 가난할까 - 미소천사
북한 어린이라면 한번쯤은 난 왜 하필 여기에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 보았을 것 같다.
“북한은 왜 가난할까?”
처음에 남한에 도착 했을 때 나를 담담했던 형사님이 처음 나에게 해준 말은 “혼자 사느라면 어려운 게 많으실 테지만 홀로서기는 님의 몫입니다.” 이다.
‘홀로서기’ 나는 그 말뜻을 그때 다 알지 못했다. 나는 조국을 떠난 날부터 홀로 서있었다.
그리고 바람 부는 이역 땅에서 조차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악명 높은 북한 감옥의 굳게 닫힌 철문 속에서도 살아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착금을 받았고 거주할 수 있는 집이 있는데 내가 더 무었을 바란단 말인가? 나에 대해서는 걱정도 말아라. 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고 꼭 성공하리라 고 자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냉정하고 혹독하기까지 한 사회현실에 마주하고 있는 오늘 그 분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였고 나는 얼마나 홀로서기를 잘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본다.
나는 내가 회사에 잘하고 있는데 차례지는 인센티브는 적다고 불만이었고 열심히 악착스럽게 모아도 북한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사장님에게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이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냉정한 사회에도 내 돈을 냉큼 집어삼킨 브로커들에게도 화가 났고 그래서 때 없이 혼자 울음을 터트리곤 하였다.
이렇게 벌어서 언제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고 끝없이 끝없이 고민하였지만 그 이유가 바로 괜찮은 척 하고 지나가는 나의 생활 속에 끝없이 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가난한 자의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였으니…….
때때로 나를 왕청같은 외로움과 서러움의 늪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옆을 의식하는 모든 그릇된 교양과 습관 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남한에 와서 2년이 된다. 나는 지금이야 앞이 조금 보이는듯하다. 그리고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나는 주체사상을 배웠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김일성의 주체 철학이다. 나는 요즘 남한의 주사파가 이해가 된다.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북한에 있을 때 나는 이 말을 늘 외우면서도 그 말의 참 뜻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철두철미 실천 속에서 배울 수 있는 남한의 주사파들이야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그 말에 현혹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말을 할 수 있고 몸으로 느끼고 실천으로 경험하기 전에는 실감할 수 없는 것을 신조로 세운 김일성이 전혀 국민을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는 것이 참말로 신기할 뿐이다.
나는 집단주의 정신 속에 살아왔다. 하기에 늘 내가 아닌 남이, 내가 아닌 집단이, 내가 아닌 사회가 변화여 언젠가 조국통일도 이루어지고 북한이 잘사는 사회가 오면 그 때는 내 불행도 끝날 거라고 믿어마지않았고 그래서 세상이 바뀌기를 열망하였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 김정일과 손을 잡을 때도 감격해 마지않았고 미국 부시대통령이 이라크를 때리면 언젠가 북한에도 도면을 놓고 수뇌부만 가려가며 때려 줄 것이라고 희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나의 중심에 서 있을 때 세상은 바뀌지 않더라도 자기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내가 벼랑 끝까지 갔을 때 어떻게 헤쳐나왔던가”를 잠시 잊고 현실에 안주하여 살진 않았을까. 그 옛날에 배운 ‘의타심, 충성심’에 낡은 관습에서 벗어 못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느라면 누가 바라봐 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세상을 대해 왔던 건 아닐까.
내안에 있는 불운의 그림자가 나의 내면에 움트고 있는 홀로서기의 새싹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내안에 있었다. 따라서 해결책도 내가 가지고 있었다. 벼랑 끝에 홀로 서있는 사람은 그 위기와 절박감을 순경으로 만들고 해탈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고 먼저 가서 기다릴 수 있는 나의 각성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부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돕지 말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투자하라”는 말이 있다.
각자는 자기운명을 바꾸어 변화해 나가며 세상은 그들로 부터 달라진다. 빌 게이츠가 윈도우를 만들고 세상이 달라졌을 때 사람들은 위대한 공헌을 한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지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시작한 그 일이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편하게 할 줄 몰랐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 오늘 나는 북한 아동들에게 말하고 싶다. 너희 들은 인생의 선배들이 받은 교육과 생각의 길을 가지 말라고... 인생은 생각의 차이에 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면서 개인의 운명을 전적으로 당에 의탁하라고 말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교육의 양면성이야 말로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나를 의식하기보다 앞서 개체가 모여 잡단을 이루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당하게 홀로 설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홀로 자신 있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남에게도 집단에도 사회에도 유익한 존재라는 사실을 북한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권력, 무력, 정보를 수단으로 ‘충성’이란 어리석은 말로 인민을 꾀이며 아부를 강요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국민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른다면 그런 국가는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집단이나 다름없다.
북한은 달라져야 한다. 북한은 3분의 1이 보안원, 보위원, 노동당 간부이다. 외세의 인도주주의 적인 도움을 바라고 주는 돈과 물질을 야금야금 씹어삼키고 아무런 부의 창조도 없이 놀고 있는 그들이다.
주민을 굶주림과 추위에 떨게 하면서 외부에 의존하려는 의타심을 버리고 말끝마다 외치는 자주 자립적 민족국가가 되려면 생각을 고쳐야 할 것이다.
2008년 10월 24일 미소천사
“북한은 왜 가난할까?”
처음에 남한에 도착 했을 때 나를 담담했던 형사님이 처음 나에게 해준 말은 “혼자 사느라면 어려운 게 많으실 테지만 홀로서기는 님의 몫입니다.” 이다.
‘홀로서기’ 나는 그 말뜻을 그때 다 알지 못했다. 나는 조국을 떠난 날부터 홀로 서있었다.
그리고 바람 부는 이역 땅에서 조차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악명 높은 북한 감옥의 굳게 닫힌 철문 속에서도 살아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착금을 받았고 거주할 수 있는 집이 있는데 내가 더 무었을 바란단 말인가? 나에 대해서는 걱정도 말아라. 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고 꼭 성공하리라 고 자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냉정하고 혹독하기까지 한 사회현실에 마주하고 있는 오늘 그 분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였고 나는 얼마나 홀로서기를 잘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본다.
나는 내가 회사에 잘하고 있는데 차례지는 인센티브는 적다고 불만이었고 열심히 악착스럽게 모아도 북한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사장님에게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이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냉정한 사회에도 내 돈을 냉큼 집어삼킨 브로커들에게도 화가 났고 그래서 때 없이 혼자 울음을 터트리곤 하였다.
이렇게 벌어서 언제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고 끝없이 끝없이 고민하였지만 그 이유가 바로 괜찮은 척 하고 지나가는 나의 생활 속에 끝없이 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가난한 자의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였으니…….
때때로 나를 왕청같은 외로움과 서러움의 늪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옆을 의식하는 모든 그릇된 교양과 습관 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남한에 와서 2년이 된다. 나는 지금이야 앞이 조금 보이는듯하다. 그리고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나는 주체사상을 배웠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김일성의 주체 철학이다. 나는 요즘 남한의 주사파가 이해가 된다.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북한에 있을 때 나는 이 말을 늘 외우면서도 그 말의 참 뜻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철두철미 실천 속에서 배울 수 있는 남한의 주사파들이야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그 말에 현혹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말을 할 수 있고 몸으로 느끼고 실천으로 경험하기 전에는 실감할 수 없는 것을 신조로 세운 김일성이 전혀 국민을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는 것이 참말로 신기할 뿐이다.
나는 집단주의 정신 속에 살아왔다. 하기에 늘 내가 아닌 남이, 내가 아닌 집단이, 내가 아닌 사회가 변화여 언젠가 조국통일도 이루어지고 북한이 잘사는 사회가 오면 그 때는 내 불행도 끝날 거라고 믿어마지않았고 그래서 세상이 바뀌기를 열망하였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 김정일과 손을 잡을 때도 감격해 마지않았고 미국 부시대통령이 이라크를 때리면 언젠가 북한에도 도면을 놓고 수뇌부만 가려가며 때려 줄 것이라고 희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나의 중심에 서 있을 때 세상은 바뀌지 않더라도 자기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내가 벼랑 끝까지 갔을 때 어떻게 헤쳐나왔던가”를 잠시 잊고 현실에 안주하여 살진 않았을까. 그 옛날에 배운 ‘의타심, 충성심’에 낡은 관습에서 벗어 못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느라면 누가 바라봐 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세상을 대해 왔던 건 아닐까.
내안에 있는 불운의 그림자가 나의 내면에 움트고 있는 홀로서기의 새싹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내안에 있었다. 따라서 해결책도 내가 가지고 있었다. 벼랑 끝에 홀로 서있는 사람은 그 위기와 절박감을 순경으로 만들고 해탈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고 먼저 가서 기다릴 수 있는 나의 각성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부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돕지 말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투자하라”는 말이 있다.
각자는 자기운명을 바꾸어 변화해 나가며 세상은 그들로 부터 달라진다. 빌 게이츠가 윈도우를 만들고 세상이 달라졌을 때 사람들은 위대한 공헌을 한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지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시작한 그 일이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편하게 할 줄 몰랐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 오늘 나는 북한 아동들에게 말하고 싶다. 너희 들은 인생의 선배들이 받은 교육과 생각의 길을 가지 말라고... 인생은 생각의 차이에 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면서 개인의 운명을 전적으로 당에 의탁하라고 말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교육의 양면성이야 말로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나를 의식하기보다 앞서 개체가 모여 잡단을 이루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당하게 홀로 설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홀로 자신 있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남에게도 집단에도 사회에도 유익한 존재라는 사실을 북한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권력, 무력, 정보를 수단으로 ‘충성’이란 어리석은 말로 인민을 꾀이며 아부를 강요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국민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른다면 그런 국가는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집단이나 다름없다.
북한은 달라져야 한다. 북한은 3분의 1이 보안원, 보위원, 노동당 간부이다. 외세의 인도주주의 적인 도움을 바라고 주는 돈과 물질을 야금야금 씹어삼키고 아무런 부의 창조도 없이 놀고 있는 그들이다.
주민을 굶주림과 추위에 떨게 하면서 외부에 의존하려는 의타심을 버리고 말끝마다 외치는 자주 자립적 민족국가가 되려면 생각을 고쳐야 할 것이다.
2008년 10월 24일 미소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