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0. 20:15

마더테레사의 삶이 인류에 드러내는 인문학적 가치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텅 빈 곳으로만 보입니다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느님께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마더 데레사-

 

저글이 진짜 테레사님이 신의 부재의 마음을 담았는지 부터 한번 살펴보시죠...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어느누가 보아도 한 평생 다른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시며 키워 온 사랑이 그 누구 보다 크지만

겸손히 그는 작다고 표현 했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앙이 있었음에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을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셨지만 열정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저게 테레사님의 모습이였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면 그분의 미소를 그리워 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허상을 알고 있었다면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히 부탁할까요???

 차분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테레사님의 저 마음의 표현의 무엇인지 명상해 보신다면 왜 저런 일기가 나올지 이해가 되시리라 봅니다.^ ^*

 

저 일기를 쓰고 난 3년뒤 그는 노벨상을 받으러 나간 자리에 하나님께 감사함을 돌립니다.

저는 그분이 노벨상을 받기 3년전에 신의 부재를 느끼다 3년후에 다시 하나님을 느꼈다고 보지 않습니다

출처> 미디어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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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의 위대함

우리는 위대한 성직자라고 하면 평생 어떤 마음의 고통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절대 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의문’ 자체가 금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김수환 추기경을, 고민하는 성직자라는 의미에서 ‘햄릿형’이라고 하지만 추기경은 어떤 특별한 활동이나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존경받기보다, 하루하루 일상적인 삶 속에 주어지는 평범한 일과 기회를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대함으로써 성인(聖人)이 된 분이다.

그가 남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은 종교적 삶이란 게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사랑스럽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빛나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추기경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수행했다. 그가 걸어간 길은 특별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따를 수 있고 또 따라가야만 할 보편적인 길이었다.

인위적인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마치 어머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신 앞에 놓아버린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이 시대 가장 극적인 인문학적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가톨릭 성녀 마더 테레사의 삶이 궁금해졌다. 일생을 외국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바치고 선종한 마더 테레사는 겉으로는 한 오라기 의심도 갖지 않는 초인적 힘으로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었지만, 그의 내면 역시 어둠과 고독으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다만 남을 위해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온 존재를 흔들어대는 고뇌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정한 철녀’ 테레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곤히야 아녜스 즈약스히야다. 편의상 세례명을 쓰기로 한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26일 지중해 연안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알바니아계인 양친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상인으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깊은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 미사는 물론 매일 아침 자녀를 데리고 가까운 성당에 나가 미사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테레사의 유전자에 박힌 봉사정신은 가정환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회고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잘 알고 있었다. 식탁에는 거의 매일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수다를 떠는 데 전기를 써서는 안 된다’며 전깃불을 끄고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먹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옷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에 불행이 닥쳐온 것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다. 테레사가 9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조국 알바니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피를 토하며 돌아왔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의사들은 ‘독살’이라고 했다.

남겨진 것은 달랑 집 한 채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업하던 사람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서 자수 제품을 팔았다. 성실한 어머니 덕분에 가게는 알토란처럼 커갔다. 역경에 처해도 좌절하지 않는 어머니 모습은 어린 테레사에게 큰 가르침이 됐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테레사의 어머니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열두 살 되던 해 테레사는 성직자의 꿈을 갖게 한 결정적 인연을 만난다. 다니던 성당에 주임교수로 부임한 얌브렌코비치 신부였다. 신부는 성당에 도서관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고전문학작품을 읽혔는데 테레사는 책읽기에 너무 열중해 어머니의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신부는 또 전 세계 선교사들의 활동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 벵골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활동이 테레사를 사로잡았다.

테레사는 태어나서 처음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특히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크면 자신도 선교사가 되어 인도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다.

테레사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수녀회에서 수녀들을 모집해 인도 각지로 보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테레사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그분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거라. 네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다르질링과 캘커타

어머니의 이 말은 평생 테레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침반이 됐다.

그녀는 예전 수녀들이 그랬듯 오랜 배 여행 끝에 인도 히말라야 산기슭 다르질링이란 곳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은 부자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할 만큼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본명 아녜스를 버리고 테레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의 성녀 테레지아에서 따온 것이다. 수련기간이 끝나고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있는 로레타 수녀원으로 갔다.

다르질링과 캘커타는 너무 달랐다. 수녀원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수녀원은 캘커타에서도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에 있었고, 슬럼가와 공장, 유동인구가 많은 철도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코앞에 있는 쓰레기장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바람이 불면 악취가 수도원으로 흘러들어왔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17년이나 일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가운데에 아쉬움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질병이 그칠 날이 없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곳에서 수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수녀원 규칙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조용하고 청결한 방에서 창으로 슬럼가를 내다보며 ‘내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좋은가?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버려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출가할 때 다짐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이 먼 나라까지 온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들,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 손발 없는 아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 병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어떤 때는 도와달라는 환청이 들렸다.

 
*수녀원을 떠나 거리로

하지만 수녀원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든 곳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환속이라면 개인의 결정에 달렸지만, 수녀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 개별 활동을 하고 싶어 했기에 교회 내부에서 그것을 받아줄 리 없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를 받은 대주교는 예상대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캘커타는 정치적 종교적 대립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수녀가 혼자 거리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끈질겼다. 무려 2년여 기다림 끝에 마침내 교황으로부터 ‘1년에 한해 수도원 외 임시거주 허가’를 얻어냈다. 말이 2년이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2년 동안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테레사 수녀의 마음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 평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수녀원을 떠나 푸른 물색 줄이 그려진 하얀 사리(인도인들의 평상복) 세 벌과 작은 십자가, 묵주 하나를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빈민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선 캘커타에서 열차로 10시간가량 떨어진 갠지스 강가 파트나에 있는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호하는 법, 주사 놓는 법, 의약품 취급하는 법, 치료나 수술을 돕는 법, 응급처치, 출산을 돕는 법 등 기본 의료교육을 받았다. 외국인 국적으로는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국적까지 인도로 바꿨다. 넉 달 간 수련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1948년 12월초 캘커타로 돌아왔다.

지금과 달리 60여 년 전 캘커타는 슬럼 그 자체였다. 마을 한가운데 저수지는 큰 웅덩이 수준이었는데 주민들은 그 물을 마시고 거기서 빨래도 했다.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악취를 풍겼다. 진료소도 약국도 학교도 없었다.

수녀는 일단 이 마을의 어른들부터 만났다. 학교를 열겠으니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웅덩이 근처 나무 아래에 학교를 열고, 주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쓰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노상교실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보였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불타는 듯한 태양 볕 아래서 허름한 면 사리를 걸친 외국인 수녀가 슬럼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장소를 제공하겠다거나 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 수녀원 학교에서 수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한두 명 찾아와 수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장소가 마련되고 협력자들도 생기자 제법 학교 모양새가 나기 시작했다. 수녀가 제일 신경 쓴 것은 청결이었다. 아이들에게 몸 씻는 것부터 가르쳤다. 몸을 씻고 온 어린이에게는 상으로 소금을 주었다. 여자애들에게는 재봉도 가르쳤다. 아이들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쁜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면 곧바로 고쳤다.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와 약국도 열고 싶었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교회’ 탄생

1950년 10월7일 단 열두 명의 수녀밖에 없던 테레사 수녀그룹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해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사랑의 선교회’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서원으로 두었다.

남을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돕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수녀회가 사랑의 선교회 수녀 자격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 그밖에 ‘성격이 명랑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굳센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의 강조였다.

수녀는 또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교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선교회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도 내부에서의 반대와 오해였다. 가장 큰 오해는 테레사 수녀가 힌두교 중심지에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러운 사람들로 더럽힌다는 항의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데모가 숱하게 일어났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우리를 죽이면 하느님 계신 곳에 더 빨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힌두교도들의 반발은 두 가지 사건으로 잠잠해졌다. 불만을 접수하고 선교회에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수녀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몸을 씻기고 간호해주는 것을 본 경찰은 오히려 성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외국인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주장대로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와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 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게 하라.”

한번은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이 결핵 말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그가 몸을 누인 곳은 사랑의 선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아와 테레사 수녀에게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30년간 사원에서 신에게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제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신 신께 경배하게 된 것은 저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이웃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선교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마더 테레사가 전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와 보니 남자는 이미 숨이 끊겼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외롭게 죽어간 사람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듯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수녀가 죽어 쓰러진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간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도도 3세기 반에 걸친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캘커타가 있는 서벵골에서는 분쟁이 유독 격렬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에 따른 인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47년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갈라졌다. 동 파키스탄은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로 완전 독립한다. 이때 인도가 방글라데시 편을 드는 바람에 서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늘 그렇듯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이었다. 목숨만 겨우 건진 사람들은 대도시 캘커타로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넘쳐나는 캘커타에 난민이 몰려들자 캘커타는 빈민소굴이 됐다. 공터뿐 아니라 공원, 도로까지 판잣집으로 메워졌다. 1971년 시청 발표에 따르면 캘커타 전체 인구 1000만 중 노숙자가 40만이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심지어 아이도 길에서 낳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흔했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상상이 간다. 어느 날은 길에서 쥐와 개미에게 반쯤 먹혀버린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시궁창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데려와 돌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니 천사가 되어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3시간 후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수녀는 사람이 홀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씨앗이 되어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인도인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은 단지 물질이나 간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그들 각자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선교회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은 이들은 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중요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다고 말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구더기가 이 여인의 몸을 파먹고 있었다. 여인을 침대에 눕히자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테레사는 “일찍이 사람 얼굴에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여인은 “감사해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지만 테레사 수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만일 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추워요, 배고파요 하면서 어서 나에게 먹을 것과 옷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여인은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사랑을 주고 갔다.’

사랑의 선교회 활동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됐다. 테레사 수녀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시설을 만들고 수녀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 런던 멜버른 등 선진국 대도시에는 육신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멜버른 시내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창문은 닫혀 있었고 실내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서 불을 켜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수녀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겠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란 현대사회의 섬처럼 분리된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1979년 12월11일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모든 곳에 캘커타가 있다’고 한 그녀의 연설은 나눔철학의 정점을 보여줬다. 마더 테레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면 누구나 ‘사랑의 선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의 고뇌

그녀의 일생은 믿음과 복종,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불굴의 소망으로 점철된 삶이다. 하루 중 1분 1초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 그녀는 기쁨으로 충만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겼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께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에너지는 침묵과 묵상이라는 내적 수행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내적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선교회 사업을 시작하고 3년 뒤인 1953년 3월 대주교에게 보낸 고해성사 편지에는 이런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제 안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사업’(선교회)을 시작한 즈음부터 계속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 비우고 평생 나누었기에 더 고독했던 여성
 
마더 테레사는 몇 해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아주 가끔 모호하게 드러냈다. 그러다 마침내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1년 뒤 테레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으로 가득했다. 아마 이런 심적 상태는 선교회라는 조직을 이끌면서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고통과 연결된 것이었으리라.

제가 예수님을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은 저를 덜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예수님과 멀어진 느낌, 끔찍한 공허함, 하느님이 제 옆에 계시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고해성사 편지들은 구구구절 절박함으로 가득하다.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느낌에 공허함까지 계속되어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누구이기에 저를 버리십니까. 저는 이렇게 애타게 부르고 매달리며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입니다. 어둠은 너무나 짙습니다. 저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표면적으로는 명랑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일도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위선적인 가면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펑펑 울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1957년 예수회 요셉 노이너 신부는 독일의 한 선교잡지에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업에 대한 글을 실었다. 뜻밖에 수녀는 자신의 고뇌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쓴 노이너 신부의 회상에는 테레사 수녀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수녀님은 내적 시련을 겪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복잡하게 얽힌 환상의 희생자가 된 것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왜 그녀를 버리셨을까? 왜 그녀는 지금 이런 어둠을 겪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에게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다른 수녀님들을 지도하며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수녀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마음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떠들어대는 고약한 위선자가 된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캘커타 빈민과의 공통점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은 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차츰 고요와 평화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은 ‘굴복’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신께 굴복하니 가난한 인도인들이 단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됐다.

모든 이에게 거절당한 채 고통 속에 버려진 캘커타 거리의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영성생활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료 수녀들의 모습도 새롭게 보였다. ‘그녀들이 점점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오랜 내적 어둠 속에서 신의 부재를 느끼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큰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다.

1975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은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5개국 85개 분원에 3000명 이상의 수녀를 가진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후 전세계로 급속히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언론이 마더 테레사와 캘커타의 기적에 주목했다.

마더 테레사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다. 1987년 멕시코 슬럼가를 돌보던 때에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켜 미국에서 가슴에 심장 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술 후에도 “나는 선 채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며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했다. 1996년부터 테레사 수녀는 자주 입원했다. 말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도 큰 고통을 겪었다. 이즈음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너무 많은 것을 (나에게) 원한다”는 말로 심적 고통을 표현했다.

1997년 9월5일 오후 9시30분, 테레사 수녀의 목숨이 꺼졌다.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최후의 순간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녀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며 ‘하느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누군가 “마더,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마더 없이 살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면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천국에 가면 여러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을 비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두 똑같은 육신을 갖고 태어나지만 정신의 숭고함으로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마더 테레사는 증명해냈다.

출처>신동아 2009.4.1 세기의 철녀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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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평전 "인류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를 읽고

작성자 :  장금애 (셋넷학교-탈북청소년 교육공동체 :문화적응 대안주말학교)

툭한 기형의 발, 햐얀 사리에 감싸인 굽은 등, 소나무 껍질 같은 손,'''''그러나 그것은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찾아 돌아다닌 발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수그린 등이었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향해 내민 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숭고한 어머니 "마더" 라고 부른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독살당하면서 생각과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18세 때 수녀가 되어 인도로 가겠다는 결심, 만류를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갖게 되었다.
아그네스 곤자의 집은 부유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고,하루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작은 정성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똑같은 하루라도 특별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가슴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극진히 대접해야 할 사람들이란다. 우리와 피를 나눈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 형제들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거라"
아그네스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어머니를 보는 것으로도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워 더 강인할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그네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았다. 아그네스는 훗날 어른이 되어 죄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불행으로 내모는,그들에게서 사랑하는 가족을 앗아가는 전쟁에 반대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사람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마더 테레사로 활동적으로 일할 때도 그의 키는 1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했다. 왜소한 체력에 몸도 약한 편이었다.
1928년 12월 1일 인도로 떠났다.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37일의 낮과 밤을 달리는 고된 여행이었다. 열여덟 살의 예비 수녀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땅으로 떠났다.
몸이 왜소하고 허약한 소녀였지만, 아그네스는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뒤에는 항상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지켜 주실거다’
테레사는 매사에 신바람 나게 일했다.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수녀였다.
테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거룩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안는가? 테레사는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그들을 가난에서 완전하게 구해 낼 수 없다는 것은 테레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아예 외면하는 일은 더 옳지 않았다. 테레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소리를 웃어넘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테레사의 신념이었다.
‘저들을 길거리에서 외롭게 죽어가게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임종을 지켜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은 당신도 익히 알고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랑입니다.”
“나는 대중을 돕기 위해 일한 일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마더 테레사에게 사랑은 생가하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것이었다.
원치 않은 폭력으로 인해 미혼모가 되는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사회의 모습이 여성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고귀한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세상은 어머니를 비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성을 지키지 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낙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가정이란 꼭 혈연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직접 낳은 자녀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가족 이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들은 그 누구라도 굶주려서는 안 되며, 폭력을 당해서도 안 되며, 외로움에 홀로 버려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하나, 사랑뿐입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심판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병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마더 테레사는 뉴욕에 머물던 날 밤 일기에 그렇게 썼다.
1979년 12월 10일 69세가 되던 그해 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두서없이 진행된 그의 연설에 전 세계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세상은 사랑을 원하고 있고,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보며 웃으세요. 가족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주세요……
자기 삶을 모두 사랑하는 일을 위해 바친 사람의 이야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곁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어디에나 발자국을 남겼다.
오늘날 나는 사랑의 힘으로 운영하는 셋넷학교에 다닌다. 병마로 겨우 일어났지만 훗날 남의 짐이 되지 않고자 시작한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감동한다.
병도 치유하며 공부도 하려니 무척 힘들지만 부족한 저에게 많은 것을 배워주는 학교가 너무 좋다. 나를 비롯한 탈북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돌봐주고 배워주시는 우리 셋넷의 하늘같은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선생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셋넷학교에 다니는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남모르는 마음의 고통과 아품을 감수하며 크고 작은 웃음을 사랑으로 만들어 주고 계시는 교장선생님 많이 고맙습니다.

------------------------------------------------------------책소개

“당신이 가진 것을 이 세상을 향해 아낌없이 베풀어도 세상은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베풀라. 당신이 이 세상을 길게, 멀리 본다면 이 세상 모든 문제는 신과 당신 사이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기도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향해 끝없이 베풀고, 무한정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마더 테레사(1910~97)가 탄생한 지 26일로 100년이 됐다. 탄생일을 맞아 고향 마케도니아는 물론 50여년 머물며 사랑을 실천한 인도 콜카타 등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벌이며 그를 기리고 있다.

국내에는 마더 테레사의 삶과 뜻을 되새기게 하는 전기, 묵상집 등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마더 데레사-어둠 속 믿음>(바오로딸·사진)은 탄생부터 선종까지의 삶은 물론 2003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가톨릭 품계에서 성인 다음의 반열)식까지 실렸다. 인간적인 면모와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까지 수록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통역이었던 레오 마스부르크 신부가 쓴 <우리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민음인)는 테레사 수녀의 청빈한 일상, 실용적인 기질 등 구체적 일화들을 잘 보여준다. <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시그마북스)은 테레사 수녀를 세계에 처음 알린 책으로, ‘사랑의 선교회’ 성장 모습과 테레사 수녀의 명상록 등이 실렸다.

<마더 데레사, 나의 기도>(청아출판사)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와 묵상이 잘 드러나 있다. 기도·가난·봉사·기쁨 등 각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실천을 강조하는 말들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에세이집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샘터)은 1997년 이해인 수녀가 번역한 책의 개정판. 테레사 수녀의 에세이, 테레사 수녀를 만난 이해인 수녀·조병준 시인의 글도 실렸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녜스 곤히야 브악스히야다. 18세에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서 수녀가 된 뒤 인도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50년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했으며, 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97년 심장질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출처> 경향닷컴
2010. 12. 15. 09:45

소개하고픈 사람, 이재석씨 아시나요?


교육자료로 공유하겠다고 퍼온 글이에요^^

지난해 이재석씨의 수상 광고작을 보고 정말 감탄했었지요.

이재석씨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부메랑 광고인데(2009깐느광고제 등 수상)

전쟁에 대해 그렇게 표현할수 있다니 넘 고맙기까지 했답니다. 

http://ideabulb.co.kr/10051746625?Redirect=Log

 

그동안 작품이 많아졌네요.
그의 이력을 조금 들었었는데 이제 책도 나왔다니 아주 고무적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광고에 담긴 철학의 일관성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의 초등학교시절,그리고 입시위주의 중고등시절

그의 진로고민은 어떠했을까요?

 

물론 그는 남다른 노력과 또 재능과 운도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책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광고천재 이제석, 학고재 (근데, 책표지가 잘못 나온건지 온갖 데에서 '이재석'이라는데 책은 '이제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펌글

 

 

이사람이 이재석씨입니다.

국내 지방대를 나와서 소위 스펙이 딸려 미국에 가게되고
거기서 성공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 되었네요.

 

한번 보세요.

 

참고로 사진들은 구글링입니다.

 

 

일명 부레랑 광고입니다.

자기가 겨눈 총이 결국 자신한테 온다는.....

 

누군가에게는 이 계단이 에베레스트일수도 있겠네요...

참 기발하죠??? 이걸 오르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겁니다.

 

 

 이건 공해는 총만큼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인데...오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아프리카에선 물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한다는 내용인데...

아프리카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기발하고, 알기쉽고, 기억에도 오래 남네요.

 

 

 

요건 지구를 초로 만들어서 지구가 더워지면 이렇게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단 한그루의 나무도 보호하자...요런 내용

 

 

 

요건 독도에 자꾸 눈독들이는 원숭이들을 묘사한겁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담배를 피면서 계속 줄수록 당신의 생일도 줄어듭니다.

 

 

 

많은 포크와 나이프는 사람수입니다. 우리 한끼식사의 소중함이죠. 다른사람들은 이 하나를 나눠먹으니...

음식남기지 마시고, 항상 감사해야겠어요. 아프리카 아이들도 많이 도와줘야겠고요...

 

 

 

요건 신문광고인데....신문지가 누군가에게는 이처럼 담요가 될 수 있다..

 

 

요건 쓰레기 봉툰데..아주 잘 늘어나고 많이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지퍼락인데...신선함을 이만큼 오래 가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유리창을 이걸로 닦으면 진짜 잘 닦일거 같네요.

 

 

우리가 원조해준 식량으로 미사일을 쏜다는.......

 

 

환경 파수꾼임.. 요기에 버리셈..

 

 

참 대단하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머리속에 들어오면서 돈도 별로 안드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재석씨도 스펙에 밀려 외국에 유학을 가서 성공한 케이슨데..

우리나라에 이재석씨를 능가할 제 2의 스티브잡스도 많을텐데 스펙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너무 많은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뭐 점점 좋아지겠죠??

 

암튼 이게 진짜 상상력이 아닐까요???

 

 

출처: http://blog.daum.net/kajas0524/40

2010. 11. 6. 10:19

비영리 학부모를 위한 좋은 까페

1. 오름교육연구소  http://cafe.daum.net/orumedu

    SBS 좋은 아침, EBS 60분 부모로 유명하신 구근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초/중/고 학부모, 학생 대상의 부모코칭, 학습자료, 입시자료 등이 있습니다.

    구근회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유명교수님들이 무료 멘토링도 가능하답니다.

 

2.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http://cafe.daum.net/no-worry

   사교육을 줄이기 위한 교육에 대해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전국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카페로 참여지향적인 카페입니다.

   여러 동영상 강의도 있고 좋은 내용들도 많습니다.

 3. 초등엄마들의 목소리 http://cafe.naver.com/mom79/

   초등학부모만을 위한 이야기 방입니다.

   초등학생 정보와 초등 학부모들의 정보 공유와 경험담들이 좋습니다.

   자료도 좋고 이야기 방 나눔이 좋습니다.



-----<사교육비 절약하는 학습법> 뿌리찾기님 -------------

2010. 11. 6. 09:31

20 : 9980 --- 김규항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만들고 있는 김규항씨가

한겨레 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

 

( 2009/08/06 ) 출처는 한겨레신문 혹은 규항넷이구요~

 

20 : 9980

 

“혹시 오늘 한국의 직업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근래 교육관련 강연을 하면 꼭 청중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아쉽게도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없다. 부모들도 교사들도 심지어 교육운동하는 이들도.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그토록 열중하는 아이들의 미래에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우리가 직업이 몇 개인지조차 모르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답은 1만개다. 최근 통계청 자료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부모들이 제 아이에게 바라는 직업은 몇 개일까? <고래가그랬어>에서 조사해본 바로는 많이 잡아 20개다.

직업이 1만개라는 건 내 아이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부모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직업은 고작 20개이니 9980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 즉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 직업에 온전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 부모는 내가 00가 되길 바랐지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쿠바의 청소부는 의사보다 월급이 많고 노르웨이의 버스기사는 대학교수보다 월급이 많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월급 따위로 직업의 귀천을 가르진 않지만, 청소부나 버스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여긴 쿠바나 노르웨이가 아니라 한국이라고? 그렇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부모들이 내 아이가 청소부나 버스기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한 한국의 현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서민 부모들은 울분에 찬 얼굴로 교육 기회의 불균형과 격차를 말한다. 우리는 이른바 일류대 신입생이 해가 다르게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자. 아이의 적성이나 재능과 무관하게 20개의 직업들을 독식해가는 그 부자 부모들은 진정 우월한 걸까? 일찌감치 제 부모의 생각을 받아들여 제 적성이나 재능과 무관하게 그런 직업들에 안착하는 그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사람은 두 가지 경로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나는 관계다. 나를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관계 속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또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남 보기에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직업이라 해도 스스로 즐겁지 않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기만 하다. 요즘처럼 20개의 직업이 적성도 재능도 아닌 성적순으로 채워지는 상황에선 20개의 직업은 오히려 행복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성적순으로 정해지는 직업들만 강조되다 보니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걸 마치 아이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머리는 좋은데 노력은 안 한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에 낙심할 이유가 없다. 공부는 여러 적성 가운데 하나이며 공부를 꼭 잘해야 하는 직업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극히 일부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건 잘할 수 있는 다른 게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한국에는 1만개의 직업이 있다. 그건 앞서 말했듯 내 아이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며, 내 아이가 그 1만 개 직업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적성과 재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할 일은 되든 안 되든 20개 직업만 생각하며 아이를 닦달하는 게 아니라, 9980개의 직업까지 두루 살피며 아이가 제 적성과 재능에 가장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20개 가운데 한 개일 확률보다는 9980개 가운데 한 개일 확률이 훨씬 높다. (한겨레)


2010. 10. 25. 19:20

수원상우쌤의 자기주도적학습~

그날 배운 중요한 핵심내용을
자기가 알아서 복습(교과서, 노트로)하고,
잘되면 동형복습(익힘책, 요점정리)하고
집에 가서는 다높이나 문제집으로 복습하는 방식이다.

학교에서 40분에서 1시간,
집에서 30분 이상(가능하면 부모님이 보실 때....)하고
집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일정 비율 권장도서 포함)을 30분 이상 보기다.

나아가 이것이 점차 정착되면
개별적인 과제(진로관련, 사회관련 다큐, 지식채널E)를 보고
소감문 써오기를 해보려고 한다
2010. 6. 25. 12:08

김교신 선생님(한국 종교인·교육가) [金敎臣]

1901 함남 함흥~1945. 4. 25.
종교인·교육자.
개요
김교신 /김교신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다.
신앙의 형성기
아버지는 염희(念熙)이고,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에 접했다. 노방전도에 깊게 감명받아 4월 18일부터 도쿄 우시고메 구[牛區]에 있는 성결교회에 출석,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1월 교회내분에 깊은 충격을 받고 6개월 동안 교회출석을 끊고 방황하다가, 일본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면서 체계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뒤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갔다. 그는 우치무라를 그리스도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옮겨 1927년 3월 졸업했다.
국내활동
1927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이후 1940년까지 12년간 재직을 하다가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또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박물학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교사활동 이상으로 천직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 〈성서조선〉이라는 월간 종교잡지 발행과 성서연구집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함석헌·송두용·양인성·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생들의 동인지로서 창간되었다. 제16호까지 편집책임자는 정상훈이었지만, 1930년 5월 제17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1942년 3월 제158호까지 발간하였다. 〈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성서연구회와 동시에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계속했다. 성서연구회 및 성서집회에서 행한 연구 및 강의·강연은 〈성서조선〉에 게재되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만들어내,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종교활동·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확신했다. 〈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 권두언의〈조와 弔蛙〉가 조선민족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송두용·유달영·김교신 등 13명이 투옥되어 1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김교신은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1944년 질소비료공장회사에 현지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을 위하여 교육·의료·주택·대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징용된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죽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신앙의 핵심은 〈성서조선〉의 간행사에서 밝힌 바와 같은 순수한 '조선산(朝鮮産) 그리스도교'의 수립이었으며,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서양 교회의 모방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시종 반선교사적(反宣敎師的) 색채로 차 있었다. 조선산 그리스도교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예수의 복음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적 애국심으로 발현되었다. "김교신이 예수보다도 그의 조국인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한 송두용의 회고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조국독립)과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일체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민족적 과제의 인식과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독립이라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민족의 고난을 지고 투쟁해나가는 생활 속에서 그의 신앙은 이른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으로 믿어지는 속죄·부활·재림의 신앙으로 중층적으로 발전해갔다. 〈성서조선〉의 초기시대인 1930년대 초반까지는 속죄신앙이 중심이며, 1935년 무렵부터 부활신앙이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 문제 등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많은 신도들이 절망 속에서 개인적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구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는 부활신앙에서 재림대망신앙(再臨待望信仰)으로 나아갔다. 〈조와〉라는 글은 그의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의 확신을 표명한 것이며, 표현은 극히 성서적이나 그 속에 투영된 내용은 민족해방을 갈구하는 강렬한 지향을 담고 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이 우리민족에게 위탁한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고난의 역사를 바탕으로 찾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저서로는 〈산상수훈연구〉(1933)·〈우치무라와 조선〉(함석헌 공저, 1940) 등이 있다.
朴千佑 글
2010. 6. 25. 12:01

이승훈 선생님 (한국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李昇薰]


1864(고종 1) 평북 정주~1930.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개요
이승훈 /이승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종이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10. 6. 24. 19:43

6.25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3] 또는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2010년 5월 현재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로 남북간에 전쟁 위기감이 다시 한번 고조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 6.25 전쟁의 배경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정상들이 전후 처리와 소련의 대일참전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제치하에 있는 한국의 독립 보장을 언급함으로써 조국 광복의 서광이 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 항복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군은 일본을 경계하여 만주와 북한지역으로 진격하였다. 한반도에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원폭투하 이후, 일본이 패전하게 되자 미국은 소련군의  남진으로 한반도를 잃게 될까 급하게 막기 위해 

38도선을 미·소 양군의 진출 한계선으로 정했다. 

이것은 한반도가 분단되는 원인이 되었다. 6.25 전쟁 이전부터 38선은 군사분계선이었다.  

남북한에 군사를 배치한 미·소양군의 점령 정책이 서로 달라

신탁통치에(우리 나라가 독립국가로 설 때까지 도와 주는) 대한 찬성과 반대가 일어나고

사상적(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대립마저 고조되면서 국토 분단은 현실로 다가왔다.

따라서 온 국민의 열망과 유엔의 통일정부 수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을 경계로

이념과 체제가 다른 2개의 정부가 한반도에 각각 수립되었다.     (출처: 대한민국 국방부)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이하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4], 주로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
(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코리아 전쟁
(Korean War[5],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보도연맹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참전국
전투부대 파견국 및 의료지원국

전투부대파견국(16개국)

의료지원국(5개국) :스웨덴, 노르웨이, 인도, 덴마크, 이탈리아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장갑차 24대 54대
전차 0대 242대 (T-34)
곡사포 105mm-m3 88문
사정거리 6500m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대전차포 57mm 140문 45mm 540문
박격포 60mm 576문
81mm 384문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군용기 연습기 20대 전투기 등 170대
육군병력 9만 4000명 19만 1680명
해군병력 8866명 4700명
공군병력 1800명 2000명
총병력 10만 4666명 19만 8380명
전투경험 대부분 없음
(신병대다수)
중국 팔로군 출신 한인중 일부
국공내전 참전 경험

2010. 6. 4. 12:46

[스크랩] `사춘기`에 대한 전문의 강연회에 초대합니다.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 팝업에 대해 무한 펌을 적극 환영합니다.

 

저는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임상제2강의실에서

6월 11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12시에 강의를 합니다.

 

각 지역에 대한 안내를 보려면 www.kacap.or.kr 을 클릭해주시거나

070-7135-6021을 눌러주세요.

 

 

2010. 5. 12. 00:04

<한민족공동체>에 대해서 - 5학년 아들 반 게시판에 올림.

<한민족공동체>란 무엇인가?

네이버의 설명
 
『동일한 민족 의식 및 일체감 그리고 동일한 문화, 역사, 언어를 갖고 객관적 요소를 바탕으로

   주관적 요소가 추가됨으로써 결합된 공동체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한민족 공동체'의 의미는 한 민족으로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일한 조상,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 공동체로

   강한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한 자랑스러운 민족임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작년에 이어 초등학교에서도 <한민족공동체>라는 주제어를 논술하는 과제가 나오고 있어요.

그 이유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초등학생도 참여시키는 것이지요.
 
<불조심> 글짓기 대회를 하는 이유처럼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생각하게 하고 몸에까지 배이게 하는 것이 교육이에요.
 
 
'한민족공동체'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을 말합니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유구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강인함과 지혜가 빛나는 한뿌리 민족)과
 
세계화(국제적 경쟁에서 인정받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우수성 발휘)라는 민족적 과제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마음에 담아 장차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 민족이 '한민족공동체'로 세계화 앞에 주도성을 갖추려면
 
민족의 분열과 분단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세계화와 동시에 진행하든지

먼저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주제로 다루는 것이 기본인 것 같아요.
 
 
'한민족공동체'는 북한과 남한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한민족의 공동체'는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

즉, 재외교포와의 관계를 서로 돌보고 합력하여

거대하고 경쟁적인 국제 무대에서 살아남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반 친구들이 장차
 
지구촌 시민의식을 갖고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어른이 되면 좋겠는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세계를 품는 비전을 펼치길 기대합니다.
 
먼저 도움이 필요한 가족(북한)을 돌보고 협력하는 현명한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 :
 
일제시대 강제이주민 자손들 (일본의 재일교포, 중국의 연변 조선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자발적 이민자들  (미국 등 세계 각처)
 
 
마지막으로 퍼온 글^^;;을 소개합니다.
 
좀 어려운 글이겠지만 역시 찬찬히 읽어 보세요^^ like a snail
 
댓글로 질문하면 좀더 쉽게 덧붙여 설명을 할게요~
 
 
 
<한민족 공동체의 의미와 세계화의 도전> 

 민족 공동체는 혈연, 지연, 언어, 문화, 역사 등과 같은 객관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민족 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추가됨으로써 공고하게 결합된 인간 공동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민족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민족 공동체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정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민족도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 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통합하는 정치 공동체가 없다면 유지·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민족 공동체는 경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상호 교류하거나 상부 상조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생활 양식으로 갈라져 사는 민족들의 예가 많이 있다. 경제 공동체는 민족 성원을 같은 생활 양식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셋째, 민족 공동체는 문화 공동체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는 그 민족 공동체의 특성을 나타내며,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동시에 현대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자기의 고유한 민족 문화 유산을 지키지 못한다면, 민족의 바탕이 흔들리고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된다.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일한 조상,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니며 위와 같은 의미의 민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 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통해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하나의 민족 공동체임을 느껴 왔으며, 강한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해 온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다음 이야기를 읽어 보자.


 

     임 교수는 학술 조사를 하기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 여러 지방을 다니게 되었다. 그 곳에서 우리 동포들이 남의 나라에 발을 딛고,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기구한 운명을 지닌 채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때마다 임 교수의 가슴에 강렬한 민족애가 불끈 일어나곤 하였다. “중국과 그 주변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거나 중국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주변 문화에 대한 강한 흡수력을 지닌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도, 중국의 1/40 정도밖에 안 되는 땅덩어리로 5000여 년이나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문화를 지켜 왔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대한가!”


     

 그러나 이러한 자랑스러운 민족 공동체는 오늘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왜냐 하면, 세계는 이제 냉전 체제의 해체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지구상 모든 나라의 국경선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각 나라, 각 민족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무한 경쟁의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강력히 전달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개방하고 세계 시장에 의존하라. 만약, 세계 시장 차원의 경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장래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화는 우리가 좋아하든지 혹은 싫어하든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인식과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의 물결이 밀려오는 모습은 19세기 말 우리 민족이 서세동점(西東漸)의 시대에 겪었던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은 근대의 서구 문명 앞에서 ‘개화(開化)’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새로운 삶의 질서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변화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였다. 다음 글을 보기로 하자.



     아아, 개화하는 일은 남의 장점을 취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데에도 있다. 남의 장점을 취하려는 생각도 결국은 자신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돕기 위한 것이다. 시세와 처지를 잘 헤아려서 판단한 뒤에, 앞뒤를 가려서 차례로 시행해야 한다.

    - 유길준, 서유견문



 그렇다면 21세기의 세계화 시대에 진입한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각성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토인비(1889~1975) : 영국의 역사가·문명 평론가이다.

역사의 연구』에서 도전과 응전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독자적인 문명 사관을 제시하였다.


 

정치 공동체 : 정치 공동체의 약화로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서세동점 : 서양의 산업문명이 동양문화를 침략해 들어가는 것.

 [출처 :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http://cafe.daum.net/eea]


* 윗글은 전부 다음 카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http://cafe.daum.net/eea)에서 협찬 받은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