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6. 10:19

비영리 학부모를 위한 좋은 까페

1. 오름교육연구소  http://cafe.daum.net/orumedu

    SBS 좋은 아침, EBS 60분 부모로 유명하신 구근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초/중/고 학부모, 학생 대상의 부모코칭, 학습자료, 입시자료 등이 있습니다.

    구근회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유명교수님들이 무료 멘토링도 가능하답니다.

 

2.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http://cafe.daum.net/no-worry

   사교육을 줄이기 위한 교육에 대해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전국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카페로 참여지향적인 카페입니다.

   여러 동영상 강의도 있고 좋은 내용들도 많습니다.

 3. 초등엄마들의 목소리 http://cafe.naver.com/mom79/

   초등학부모만을 위한 이야기 방입니다.

   초등학생 정보와 초등 학부모들의 정보 공유와 경험담들이 좋습니다.

   자료도 좋고 이야기 방 나눔이 좋습니다.



-----<사교육비 절약하는 학습법> 뿌리찾기님 -------------

2010. 11. 6. 09:31

20 : 9980 --- 김규항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만들고 있는 김규항씨가

한겨레 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

 

( 2009/08/06 ) 출처는 한겨레신문 혹은 규항넷이구요~

 

20 : 9980

 

“혹시 오늘 한국의 직업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근래 교육관련 강연을 하면 꼭 청중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아쉽게도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없다. 부모들도 교사들도 심지어 교육운동하는 이들도.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그토록 열중하는 아이들의 미래에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우리가 직업이 몇 개인지조차 모르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답은 1만개다. 최근 통계청 자료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부모들이 제 아이에게 바라는 직업은 몇 개일까? <고래가그랬어>에서 조사해본 바로는 많이 잡아 20개다.

직업이 1만개라는 건 내 아이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부모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직업은 고작 20개이니 9980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 즉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 직업에 온전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 부모는 내가 00가 되길 바랐지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쿠바의 청소부는 의사보다 월급이 많고 노르웨이의 버스기사는 대학교수보다 월급이 많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월급 따위로 직업의 귀천을 가르진 않지만, 청소부나 버스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여긴 쿠바나 노르웨이가 아니라 한국이라고? 그렇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부모들이 내 아이가 청소부나 버스기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한 한국의 현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서민 부모들은 울분에 찬 얼굴로 교육 기회의 불균형과 격차를 말한다. 우리는 이른바 일류대 신입생이 해가 다르게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자. 아이의 적성이나 재능과 무관하게 20개의 직업들을 독식해가는 그 부자 부모들은 진정 우월한 걸까? 일찌감치 제 부모의 생각을 받아들여 제 적성이나 재능과 무관하게 그런 직업들에 안착하는 그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사람은 두 가지 경로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나는 관계다. 나를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관계 속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또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남 보기에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직업이라 해도 스스로 즐겁지 않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기만 하다. 요즘처럼 20개의 직업이 적성도 재능도 아닌 성적순으로 채워지는 상황에선 20개의 직업은 오히려 행복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성적순으로 정해지는 직업들만 강조되다 보니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걸 마치 아이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머리는 좋은데 노력은 안 한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에 낙심할 이유가 없다. 공부는 여러 적성 가운데 하나이며 공부를 꼭 잘해야 하는 직업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극히 일부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건 잘할 수 있는 다른 게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한국에는 1만개의 직업이 있다. 그건 앞서 말했듯 내 아이가 1만개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며, 내 아이가 그 1만 개 직업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적성과 재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할 일은 되든 안 되든 20개 직업만 생각하며 아이를 닦달하는 게 아니라, 9980개의 직업까지 두루 살피며 아이가 제 적성과 재능에 가장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20개 가운데 한 개일 확률보다는 9980개 가운데 한 개일 확률이 훨씬 높다. (한겨레)


2010. 10. 25. 19:20

수원상우쌤의 자기주도적학습~

그날 배운 중요한 핵심내용을
자기가 알아서 복습(교과서, 노트로)하고,
잘되면 동형복습(익힘책, 요점정리)하고
집에 가서는 다높이나 문제집으로 복습하는 방식이다.

학교에서 40분에서 1시간,
집에서 30분 이상(가능하면 부모님이 보실 때....)하고
집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일정 비율 권장도서 포함)을 30분 이상 보기다.

나아가 이것이 점차 정착되면
개별적인 과제(진로관련, 사회관련 다큐, 지식채널E)를 보고
소감문 써오기를 해보려고 한다
2010. 9. 16. 20:46

그 어려움이 기초실력을 흔드는 초등개정교과서

제가 어제 우리 셋째(초1) 수학 단원평가 시험지 보고

또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아이 앞이라 속으로 숫자를 세었습니다.

공교육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더구나 이렇게 교과서 편성 때문에 커질 줄은 예전엔 몰랐습니다.

큰 아이 저학년 때는 애가 잘하니까,

둘째는 좀 늦되거니 하고...말았는데

세번째가 되다 보니 좀 기준이 생겼는지

애가 형편없는 점수를 밥먹듯 하니 원인분석 들어가고

교과서 내용 자체와 시험평가문제의 심화 정도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1학년 1학기 때에도 어이 없었는데

역시 2학기 되니까 난이도 스킵의 정도가 가속이 붙습니다.

물론 잘 하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아직 의식 못하시거나

3학년 정도 되어 사회과목과 수학의 난이도에 당황하시게 될겁니다.

당근 우리 둘째의(초3) 학습의욕 저하는

수학과 사회과목에 집중됩니다.
비록 일기장과 독서장에 외계의 맞춤법을 보여 주지만

국어평가의 결과는 그나마 우수합니다. 독해능력은 되나 봅니다.
그런데 2학기 시작되고 수업시간에 좀 멍때리는지

일기장에 샘께서 다정하게 '수업시간에 집중 좀 해다오~'

부탁하시는 댓글 남기셨네요.

아들에게 물으니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답니다.

특히 사회 말이에요. 집에서 사회영역 책을 읽지만

대충읽기의 습관 때문에 전문용어가 익혀지지 않은 거지요.

 

다시 1학년 수학 문제의 심화정도를 말씀드리지면...

지난 번에도 댓글 달았지만

이게 정말 개념을 가르치는 건지 심화평가를 작정했는지

2,3번 꽈대기는 5문제 이상이고

덧셈은 10이하 배우고 뺄셈은 한자리 수끼리 하는 아이들에게

두 자리수의 차가 5이상 나는 문제가 표를 이용해 나오고,

빌려오기 해야 가능한 뺄셈문제가 나오든지,

5단 이상의 곱셈의 개념을 알아야 풀만한 규칙성 개념 문제... 등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우리 둘째 2학년 때 풀었을까 싶은 문제들...

교과서에는 아이들 연령에 비해

점점 어려운 과정이 뚝뚝 내려오고

5학년은 말 다했지요...

 

예전에는 한글이나 그런가 했는데

이젠 선행의 영역을 검증 안하고 평준화 시키고 

평균을 높이고 심화를 바로 들이댑니다.

공부 수준이 낮다는 우리 학교가 이러니 ㅎㅎ
다른 학교는 어떨지 상상이 됩니다.

 

이제 학원도 선행은 한물 갔고 "심화"가 새마케팅의 타이틀이랍니다.

꿋꿋이 개념이라도 짚고 넘어가자는 엄마의 아들들은

단원평가에서 조차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네요.

근데 알고보니 반애들 평균이 예전에는 90점 대가 즐비했다면

요즘은 아니라는군요. 샘들도 수고가 갑절이 되는거죠.

 

옛날 고등학교 때 수학시간이 생각납니다. 앞줄 5명을 위한 수업...

오늘 아래 기사와(기사는 원문 링크만 걸어 놓으라셔서)  

또 어떤 엄니가 교육부 장관에게 교과서에 대한 제안서를 보냈다는

펌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교원평가서 쓸 때 기타의견으로 썼는데

학교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요? ㅜㅜ

이런 문제의식이 성적이 안 좋은 자녀를 둔 저만의 고민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이렇게 불가피한 교과서의 수정 과정을 어떻게 촉구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초등교사가 만든 교과서, 왜 어려운가 했더니 - 오마이뉴스

2010. 9. 10. 13:37

(발췌문) '모두에게 적합한 획일적인 교육이란 없다'-기버님


이 글은  승산사 출판의 켄 로빈슨, 루 애로니카 저  < 엘리먼트 >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구미의 교육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쪽에선 자기네도 문제가 무척 많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켄 로빈슨은 교육과 자기계발 전문가로서 그 공헌을 인정받아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았습니다.

노동자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고 유년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 대상의 특수학교에 다녔는데

학업성취동기가 높은 것을 인정받아 상급학교에서 일반학생들과 같이 다니면서 노동자 계층에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


TED conference 에서 " 학교는 창의성을 죽이고 있는가" 라는 강연으로 8천만회의 download를 받을만큼

주목을 받았고 <엘리먼트>에서 창의성 교육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먼트란 소질과 열정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엘리먼트만 가지게 되어도 무아지경의 행복한 인생을 살게되지만,  여기에 태도와 노력이 주어지면 사회적 성공도 이룬다는 메시지를 주는군요.


흥미있는 예시가 많았지만 간단히 일부만 인용합니다.


 " 내 주변에서 가장 머리 좋고 창의적인 사람들 중 상당수는 학업에 뛰어나지 않앗다. 

그들 대부분은 학교를 졸업하고 잘못된 교육에서 회복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능력과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고, 1960년대에 그곳에서 리버풀 대학교를 다녔다. 

도시 반대편에는 리버풀 인스티튜트라는 학교가 있었다.

당시 리버풀 인스티튜트의 학생중에는 폴 매카트니가 있었다.


폴은 리버풀 인스티튜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빈둥거리면서 보냈다.

방과후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신 그는 주로 록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연습했다.


시간이 지난 후, 그건 폴에게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특히 그가 다른 지역에서 열린 학교 축제 때 존 레논을 만나 후에는 말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조지 해리슨과 함께, 이후에는 링고 스타도 합류해 비틀즈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그것은 멋진 결정이었다.


1980년대 중반쯤에는 리버풀 대학교와 리버풀 인스티튜트가 모두 폐교하게 된다.

건물은 텅 빈 채 버려져 있었다.

이후에 두 장소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내가 다니던 학교 건물을 고급 아파트로 리모델링 했다.


내가 다닐 당시에 리버풀 대학교는 고급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으니 그건 큰 변화였다.

리버풀 인스티튜트는 유럽의 최고 예술 교육기관중 하나로 손꼽히는 리버풀 공연 예술 전문학교 LIPA로 변모했다.

LIPA의 주요 후원자는 폴 매카트니 경이다.


그가 백일몽에 빠져 십대를 보냈던 낡고 칙칙한 강의실은

 그가 당시에 꿈꿨던 것처럼 음악 또는 공연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모여든 전 세계의 학생들로 채워졌다.


나는 LIPA의 초기 설립단계에 관여했고, 개교 10주년을 맞아 학교 이사회는 나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나는 매카트니 경에게 상을 받기 위해 리버풀로 돌아가 LIPA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내용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발견해야만 하는 이유, 많은 경우 학교 교육이 그 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때때로 학교 교육은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 등을.


매카트니 경도 그날 연설을 했는데, 마침 내가 이야기한 내용애 대해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음악을 사랑했지만 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좋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음악 선생님들은 낡아빠진 클래식 음약을 들려줌으로써 학생들이 음악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것은 학교의 다른 수업들만큼이나 지루했다.


폴은 자신이 공교육과정 전체를 이수하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심지어 리버풀 성당의 합창단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일도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폴의 노래 실력은 합창단의 입단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정말 그럴까.

그 합창단의 실력이 정말 그렇게 대단했을까?

아니 폴이 들어가기에 실력이 부족할 합창단이라는 게 과연 세상에 있기는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매카트니의 입단을 거부했던 합창단은 나중에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2곡을 공연하게 된다.


학교에서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매카트니 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의 학교 합창단도 그의 입단을 거부했다.,

그들은 엘비스의 목소리가 그들의 노래를 망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리버풀 성당의 합창단과 마찬가지로 엘비스가 다니던 학교의 합창단 역시 어떤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었다.

어찌 됐든 엘비스를 거부했던 합창단이 얼마나 성공적이었을지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몇년 전에 나는 코미디언 단체인 몬티 파이턴 출신의 존 클리셰와 창의성을 주제로 한 강연을 여러 차례 공동으로 진행했다.

나는 존에게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학업에는 뛰어났지만 막상 실질적으로 자신의 삶에 전부가 될 코미디에는 별 소질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에게 유머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의 유머감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만약 이런 예들이 예외적인 경우라면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런 예들이 너무도 즐비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학업을 잘 수행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물론 적어도 그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학교를 문제없이 잘 다니고 현재의 교육제도에 만족해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채 학교를 졸업하거나 중도에 그만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학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재능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교육계와 그 주변에서 보냈는데,

이러한 상황이 개별 교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 중에는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어린이들로부터 당장 아주 멀찍이 떼어놓아야 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좋은 교사들이 있고, 또 적지않은 훌륭한 교사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감화를 주었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선생님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조차도 공교육 제도의 문화와 관성으로 인해 방해받고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교육 제도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전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왔을 때, 우리 아이들 제임스와 케이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미국의 교육제도는 영국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이전에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엇던 미국 역사와 같은 과목을 공부해야만 했다.


영국에서는 미국 역사에 관한 내용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이 불편한 주제에 대해서는 은폐하는 게 영국의 정책이다.


우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 나흘 전에 미국에 도착했기 때문에 영국을 미국땅에서 몰아낸 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미국에서 몇 해를 보냈고 독립기념일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 날에는 집안에서 커튼을 내리고 여왕의 오래된 사진을 감상하며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면에 있어서 미국의 교육제도는 영구을 포함한 전 세계 대부분 나라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세 가지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특징은 특정 몇 가지 학문적 재능에 대한 강조이다.

나는 물론 학문적 재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제도는 주로 언어와 숫자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논리적 추론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능력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지능은 이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하다.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두 번째 특징은 과목 간의 위계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맨 상위에는 수학, 과학, 그리고 언어적 능력이 자리 잡고 있다.

중간에는 인문학이 있고, 맨 아래에 예술이 있다.

예술 내에서는 또 다른 서열이 존재한다.

음악과 미술이 공연예술보다 상위로 취급받는다.


게다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학교들이 교육과정에서 예술과목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큰 규모의 고등학교에 미술교사가 단 한 명밖에 없는 경우도 잇고,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그림 그리기를 거의 배우지 못한다.


세 번째 특징은 특정 종류의 평가 방식에 점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은 아주 좁은 영역을 평가하는 표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더욱 더 강한 압박에 시달리고 잇다.


왜 전 세계의 학교제도가 이렇게 됐을까?

이것은 문화적인 요인과 역사적인 요인이 섞여있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내 주장은 교육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제도가 이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현대의 교육제도가 비교적 최근인 18,19세기에 만들어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제도는 당시 유럽과 미국의 산업혁명시기의 경제적 필요에 맞춰 설계됐다.

수학,과학 그리고 언어적 능력은 산업경제 시대의 직업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교육제도의 형성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대학의 학구적 문화이다.

대학의 학구적 문화는 감성, 육체, 감각, 그리고 우리 뇌 상당 부분의 기능을 경시해왔다.


이러한 결과로 전 세계의 학교제도는 지능과 인간 잠재력에 있어 매우 좁은 관점을 사람들의 머리에 심어주었고,

특정 종류의 재능과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풍조를 만들어냈다.


그런 과정에서 학교제도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다른 재능을 경시했고, 우리의 삶과 공동체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인간 특성들의 상관관계를 무시해버렸다.

이처럼 계층화되고 획일화된 교육은 이런 방식의 학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켜왔다.


전 세계적으로 정규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것처럼 댄스를 매일 가르치는 학교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몸을 움직일 때만 무엇인가에 몰입할 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질리언 린은 댄스를 시작한 이후로 다른 모든 학과목의 성적도 올랐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생각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질리언의 인생에서 심리상담가가 해주었던 역할을 해줄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집중을 하지 못하고 부산하게 구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은 약을 처방받고 얌전히 있으라는 꾸지람을 듣는다.


그리고 현재의 교육제도는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과 학생들이 배우는 방식에 있어 지나칠 정도로 형식적인 제약을 둔다.

학문적 능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종류의 사고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시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사가 서술적인 방식으로만 가르칠 때 그 과목에 대해 전혀 흥미를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제도는 갈수록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획일적인 방식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깨달음의 이야기들이 함의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들만의 깨달음을 찾으려면, 

인간 지능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


                                                     


( 위에 나오는 질리언 린은  초등학교때 ADHD 증상을 보여 특수학교로 보내질 뻔 했는데

훌륭한 심리상담가를 만나 수업중 산만하고 몸을 자주 움직이는 것이 병의 증상이 아니라 

좋아하는 몸놀림에 집중할 수 없어서 였음을 알게되어


댄스학교로 전학하여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영국 로열발레스쿨 졸업후 솔로 발레리나로 대성공하였고

후에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등의 안무가로 대활약을 하였습니다. )



나의 댓글 :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부담을 자주 느낍니다.
제 아이들을 판단하고 버거워 하고 쉬운 방법이 없나 게으름에 지고 싶을 때마다요. 현 교육이 선택한 학습의 과목 위계라든가 편파적 평가방법은 저나 저의 아이들에게는 잘 맞지 않거든요.

개인적인 성향이나 단적인 게으른 속성의 문제가
학습 부진 또는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
동기부여의 무기력으로 이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가끔씩
늦게 피는 꽃이야
좀 늦되는 것 같구나
아직 눈이 뜨이지 않은 게야
하면서 아이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윽박지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인정하고 일단은 아이들을 심정적으로 지원하는 엄마가 되어 주는게
저의 몫이 아닌가 생각은 하는데 으찌 된게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늘 쫓기는 패턴이네요. 그래서, 쉬 짜증을 내고 철없는 엄마로서 거울을 보기가 싫을 때가 참 많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차분하게 "엄마가 너희에게 할말이 있단다. 이불깔고 잘 준비 되면 엄마 불러~" 이러면 대흥분입니다. 우리 엄마가 연중행사로 책읽어 줄래나, 이야기 만들어 들려 줄래나 하며 야단이지요. 최근에는 그날 작정하고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애쓴 후 칭찬을 해 주었지요. 차암 좋아하더군요... 근데 저희 집은 자기 전에 책 읽어주기는 커녕 자는 시간을 넘기 일쑤여서 -장난 치느라- 엄마는 뚜껑 열리고 (이미 체력 고갈) 자는게 미션이 될 때가 많아요.


기버님 댓글:
애들과 즐겁게 잘 지내시네요.

좋은 엄마 좋은 선생님의 조건은 아이의 자신감을 꺾지 않는 것,
훌륭한 엄마와 훌륭한 선생님의 조건은 자신감과 함께 열정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합니당 ^^


나의 배움---
부모역할의 단순화~~
자신감과 열정의 지원자...
제가 워낙 촉각이 복잡한 사람이라 단순화를 더 원하기는 하는데...
암튼 애들 키우며 성장한다는게 그런거겠지요?^^
2010. 6. 28. 10:55

2010등대지기학교 미션 영상

2010. 6. 25. 12:08

김교신 선생님(한국 종교인·교육가) [金敎臣]

1901 함남 함흥~1945. 4. 25.
종교인·교육자.
개요
김교신 /김교신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다.
신앙의 형성기
아버지는 염희(念熙)이고,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에 접했다. 노방전도에 깊게 감명받아 4월 18일부터 도쿄 우시고메 구[牛區]에 있는 성결교회에 출석,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1월 교회내분에 깊은 충격을 받고 6개월 동안 교회출석을 끊고 방황하다가, 일본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면서 체계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뒤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갔다. 그는 우치무라를 그리스도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옮겨 1927년 3월 졸업했다.
국내활동
1927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이후 1940년까지 12년간 재직을 하다가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또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박물학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교사활동 이상으로 천직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 〈성서조선〉이라는 월간 종교잡지 발행과 성서연구집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함석헌·송두용·양인성·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생들의 동인지로서 창간되었다. 제16호까지 편집책임자는 정상훈이었지만, 1930년 5월 제17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1942년 3월 제158호까지 발간하였다. 〈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성서연구회와 동시에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계속했다. 성서연구회 및 성서집회에서 행한 연구 및 강의·강연은 〈성서조선〉에 게재되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만들어내,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종교활동·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확신했다. 〈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 권두언의〈조와 弔蛙〉가 조선민족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송두용·유달영·김교신 등 13명이 투옥되어 1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김교신은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1944년 질소비료공장회사에 현지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을 위하여 교육·의료·주택·대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징용된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죽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신앙의 핵심은 〈성서조선〉의 간행사에서 밝힌 바와 같은 순수한 '조선산(朝鮮産) 그리스도교'의 수립이었으며,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서양 교회의 모방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시종 반선교사적(反宣敎師的) 색채로 차 있었다. 조선산 그리스도교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예수의 복음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적 애국심으로 발현되었다. "김교신이 예수보다도 그의 조국인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한 송두용의 회고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조국독립)과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일체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민족적 과제의 인식과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독립이라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민족의 고난을 지고 투쟁해나가는 생활 속에서 그의 신앙은 이른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으로 믿어지는 속죄·부활·재림의 신앙으로 중층적으로 발전해갔다. 〈성서조선〉의 초기시대인 1930년대 초반까지는 속죄신앙이 중심이며, 1935년 무렵부터 부활신앙이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 문제 등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많은 신도들이 절망 속에서 개인적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구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는 부활신앙에서 재림대망신앙(再臨待望信仰)으로 나아갔다. 〈조와〉라는 글은 그의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의 확신을 표명한 것이며, 표현은 극히 성서적이나 그 속에 투영된 내용은 민족해방을 갈구하는 강렬한 지향을 담고 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이 우리민족에게 위탁한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고난의 역사를 바탕으로 찾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저서로는 〈산상수훈연구〉(1933)·〈우치무라와 조선〉(함석헌 공저, 1940) 등이 있다.
朴千佑 글
2010. 6. 25. 12:01

이승훈 선생님 (한국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李昇薰]


1864(고종 1) 평북 정주~1930.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개요
이승훈 /이승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종이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10. 6. 24. 19:43

6.25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3] 또는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2010년 5월 현재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로 남북간에 전쟁 위기감이 다시 한번 고조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 6.25 전쟁의 배경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정상들이 전후 처리와 소련의 대일참전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제치하에 있는 한국의 독립 보장을 언급함으로써 조국 광복의 서광이 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 항복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군은 일본을 경계하여 만주와 북한지역으로 진격하였다. 한반도에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원폭투하 이후, 일본이 패전하게 되자 미국은 소련군의  남진으로 한반도를 잃게 될까 급하게 막기 위해 

38도선을 미·소 양군의 진출 한계선으로 정했다. 

이것은 한반도가 분단되는 원인이 되었다. 6.25 전쟁 이전부터 38선은 군사분계선이었다.  

남북한에 군사를 배치한 미·소양군의 점령 정책이 서로 달라

신탁통치에(우리 나라가 독립국가로 설 때까지 도와 주는) 대한 찬성과 반대가 일어나고

사상적(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대립마저 고조되면서 국토 분단은 현실로 다가왔다.

따라서 온 국민의 열망과 유엔의 통일정부 수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을 경계로

이념과 체제가 다른 2개의 정부가 한반도에 각각 수립되었다.     (출처: 대한민국 국방부)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이하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4], 주로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
(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코리아 전쟁
(Korean War[5],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보도연맹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참전국
전투부대 파견국 및 의료지원국

전투부대파견국(16개국)

의료지원국(5개국) :스웨덴, 노르웨이, 인도, 덴마크, 이탈리아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장갑차 24대 54대
전차 0대 242대 (T-34)
곡사포 105mm-m3 88문
사정거리 6500m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대전차포 57mm 140문 45mm 540문
박격포 60mm 576문
81mm 384문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군용기 연습기 20대 전투기 등 170대
육군병력 9만 4000명 19만 1680명
해군병력 8866명 4700명
공군병력 1800명 2000명
총병력 10만 4666명 19만 8380명
전투경험 대부분 없음
(신병대다수)
중국 팔로군 출신 한인중 일부
국공내전 참전 경험

2010. 6. 4. 12:46

[스크랩] `사춘기`에 대한 전문의 강연회에 초대합니다.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 팝업에 대해 무한 펌을 적극 환영합니다.

 

저는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임상제2강의실에서

6월 11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12시에 강의를 합니다.

 

각 지역에 대한 안내를 보려면 www.kacap.or.kr 을 클릭해주시거나

070-7135-6021을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