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29. 10:34

새천년 국민체조

http://blog.daum.net/mountain-love/12218454


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SnIZTbfVO80$  요긴 쉬운 천천히


이곳을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어요. 30분 하면 땀나요.^^;;;
 
요긴 기본체조
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BtSKgSbNMRA$
2008. 11. 28. 20:04

영재성 검사 기출문제집?







새로 덧붙이는 글(2008.12.5)


어쩌나~~~이 글을 쓴 당시에는 아래 교재를 나름 비교해서 선택했기에 급한 심정인 분들 계시면 참고삼으시라고 올렸는데 저는 <영재성 검사>를 구입했지만 잘 맞지 않는 책이네요.



<이 교재의 특징> '영재성검사' , 넥젠북스

1.'초-중등공통' 구성



제  아이는 초등3학년인데 학교수학도 겨우 따라가는데 교재의 수리영역은 거의 접근불가이고

'초중등공통' 구성이라서 혹 많이 어려울까 싶었는데

최저학년으로서 어렵긴 어렵습니다.

문제를 다양하게 난이도를 다양하게 경험하는데에는

적절합니다. 제 아이를 과대평가한 거 같기도 하고...

좀 미안한데 아이가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성취감이 적으니까) 다행히 포기까지는 않으니 그냥 이리저리 보고 골라서 풀어보라고 하고만 있습니다.



2. 동영상 강의가 없다.


3일 정도 적응해 보니, 동영상 강의가 있었으면 첫 시도인 아이에게 동기부여에 도움이 되었을까 그 흔한 동영상 강의를 아쉬어 해 봅니다. 사실 동영상 해설을 보면 그야말로 '창의성'에 제한을 받을까봐 과잉반응 내지는 과잉보호를 한 셈이죠.--;;



3. 가격도 좀 센 편입니다.


그래도 문제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수준도 높으리라 예상하고 구입했는데 동영상 강의 서비스를 갖추었더라면 좀 착한 가격이라고 칭찬했을 것 같습니다.


^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1주일 채 남지 않은 2차 또는 3차전형 성실하게 준비하고 그 준비과정에서도 우리 아이들이 생각과 꿈이 더욱 자라나길 바랍니다.
모두 선의의 경쟁 아자아자!!



(2008.11.28) 예전에 쓴 글

참나~ 이런 정보를 여기다 쓰게 될줄 몰랐네요. 암튼 저희 아이와 또 몇명의 친구가 같이 좀더 깊은 탐구의 경험을 기대하며 추천 받은 기쁨과 감사를 안고 응시를

준비하게 되었으니
열심히 준비해서 이 준비하는 과정부터
선한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음~ 저는 문제집 2개를 보았는데요,
1. '교육청 영재교육원 영재성검사'
영재교육전략연구소, 넥젠북스
알라딘 최저가 17000원 --15300원

2.'영재성검사'  안쌤 영재교육연구소, 시대교육,
알라딘 최저가 13500원


그밖의 참고 주소이지만,
어찌된 건지 이렇게 지식인에서 옮겨다 놓으면 회원가입을 해야 읽을 수 있다니까
별소용없는(?) 정보가 되는 것도 있네요.


이리저리 뒤지다 보니 정말 대한민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이제야 조금 알것도 같네요.
아~ 휩쓸리지 말고 줏대있게 선택하고 살아야하는데
더욱 겸손히 분별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http://cafe.daum.net/saykiss/ElKx/2414?
docid=1AI6H|ElKx|2414|20081015103751&q=%BF%B5%C0%E7%B1%B3%C0%B0%BF%F8%204%C7%D0%B3%E2%20%BD%C3%C7%E8&srchid=CCB1AI6H|ElKx|2414|20081015103751




영재교육원4학년시험 치시면 파일여러개나올거에요


그리고 영재교육원시험은 실력도중요하긴하지만


창의성이더중요해요


고정관념을깨서생각하세요

2008. 11. 28. 18:04

교육청 영재원 --- 서울특별시서부교육청 영재교육원(관련글 모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글은 naver와 daum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정보를 모으느라 한 곳에 급하게 펼쳐 놓았는데 혹시 저작권에 관련되는 글이 있다면 삭제하겠습니다.




문제집 추천 ---http://cafe.daum.net/parentsgifted/UiOl/10.




re: 교육청 영재 시험 대비 참고서 좀 가르쳐주세요

비공개

답변채택률 10.0%

2008.11.27 20:00

영재교육원4학년시험 치시면 파일여러개나올거에요


그리고 영재교육원시험은 실력도중요하긴하지만


창의성이더중요해요


고정관념을깨서생각하세요






일단 시험 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차와 2차는 일반 문제입니다. 어떤 유형인지는 기억이 안나는 군요...

3차는 서술형 평가입니다. 창의력 평가이지요.

4차는 면접 및 구술고사 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한명식 2명의 감독 위원과 질문에 대답을 한다고 보시면 되지요...


문제 유형으로는말이죠, 일단 선행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보구요,

자신이 아는 것을 얼마나 활용할 줄 아느냐를 묻는듯한 문제들입니다.

응용력을 판단하는 문제이지요...

1차와 2차는 객관식. 믿지못할 제 기억으로는 24문항인가로 기억합니다. (변할수도...<-)

3차시험 설명입니다.

제 기억으론, 6문항에 답안지로 B4용이 3장 있었습니다. 문제의 예를 든다면,

 '투명하지 않은 플라스틱 공에 어떤 물체가 들어있다. 플라스틱 공을 부수지 않고, 속에 든 물체를 알아내는 방법을 7가지 이상 서술하시오.'

대충 이렇습니다. 작년 이었는지, 제작년 초등 6학년 영재 시험에 나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푼 기억은 있습니다.

'7가지 이상 서술'에 대해 압박을 느끼지 마세요. 말만 되면 맞는 말입니다.

창의력을 요하는 문제이니, 과학과는 좀 다르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문제의 답을 몇가지 알려드리지요... 모범답안은 안뜨지만, 전 이렇게 썻어요... 한가지 기억 나는군요.

1. X-ray사진을 찍어 내용물을 본다.

대충 이런 답안을 써서 냈습니다.<-

그리고, 제작년에 있었던 '과학 영재 올림피아드'에서 서술형 문제중

'기압계를 사용하여 63빌딩의 높이를 젤 수 있는 방법을 7가지 이상 서술하시오'

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모범답안에서 나온 7가지중 한가지는

'기압계를 63빌딩 직원에게 준뒤, 63빌딩의 높이를 물어본다.'

기압계를 사용해서 알아내랬으니, 직원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대가로 기압계를 사용(지불)한 것이니 문제의 요구에 맞는 것이라 봅니다. 즉, 3차시험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차 시험만 통과하면 영재원 합격 확률이 99%라고 봅니다.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년 시험당시엔, 20명을 뽑는데, 3차 시험 합격자가 20명이었었지요.

그리고 그 20명으로 4차 면접을 본것입니다. 제 기억으론, 모두 합격한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4차시험 불참시에는 불합격이 되는것이지요...

질문중 기억나는것이,

'가장 존경하는 과학자와 그 이유'

입니다.


문제의 요구 사항은 선행이나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그 지식을 얼마나 활용하느냐 인것같네요.

전 선행을 수학외에는 하는게 없지요...<-

2차시험에서 보겠군요~ 열심히 하세요~






먼저 영재시험을 볼 수 있다면 상당히 우수한 인재로군요. 저는 영재교육원 담당교사입니다.

강동교육청에는 3부분 영재교육원이 있습니다. 수학, 과학, 정보분야인데 질문자는 어느 분야이신지 궁금하네요.

우선 교대영재교육원특강반에서 교육을 받으셨다면 어느정도 유형은 익히셨을것 같군요.

문제가 교대나 교육청이나 비슷한 유형이랍니다. 단순 지식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문제위주로 나오고요,  수학, 과학이라면 시중에 올림피아드 문제집등이 나와있는데 그런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같은 문제가 나오지는 않지만 생각을 많이 하고 다양하게 문제를 풀어보는게 도움이 되거든요.

2차 시험을 통과하면 겨울방학 전에 3차 심층 면접을 봅니다. 시험에 붙으면 심층 면접도 준비하셔야겠지요? 이것도 생각하는 문제를 주고 어떤 식으로 답을 말하는지 봅니다. 답이 틀려도 과정이 창의적이면 점수를 줍니다.

내년에 6학년이 되는 학생이지요? 수학, 과학은 5명을 뽑고 정보는 20명을 뽑습니다. 어느 분야인지 모르지만 열심히 해서 꼭 영재교육을 받으시면 본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영재교육원 시험 참가 신청 방법은?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의 추천서를 받고 입학원서를 써야합니다.
2.영재교육원, 시험은 뭘 보고 어떻게 하죠?
시험은 뭘 보고가 없습니다.과목이 과학이면 자기 나이에 맞는 과학(교과서엔 없고 한단계 더 어려운 과학)공부해야합니다. 수학이면 수학대로..
3.시험은 총 몇차까지 있나요?
총 3차까지 있는 걸로 압니다.
4.영재교육원시험 어렵나요?(또는 시험 문제유형..)
영재교육원시험은 2차시험에는 필기시험입니다.
필기시험에는 과학의 기초지식을 판단하는 시험이죠 그래서 중학생1학년 정도의 과학 수준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객관식과 주관식입니다.
그리고 3차시험은 구술시험인데 문제를 풀고나서 왜 그 답이 나왔는지 감독관과 대화하는 것입니다.(제가 쳐 봤는데 힘들었어요..ㅠㅠ 다행히도 합격)
5.다른 좋은 정보
3차시험때는 자기생각이 들어가는게 점수를 높입니다. 남이 이미낸 생각을 넣으면 점수가 낮아지죠.
(제가 교육청영재원에 다니는데 대학교면 모르겠네요.)
이상 끝입니다.
그리고 성적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를 하는 사람이 많이 뽑혔다고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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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영재학회 시험대비 - 기출문제

  • 글쓴이: 이혜경
  • 조회수 : 656
  • 08.09.19 20:47
http://cafe.daum.net/HK-MATH/Wm7/12주소 복사

영재원 기출문제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첨부파일 2006년초등영재교육원[기출문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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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때 교육청주관 영재원에 다닌 경험들려주세요
http://cafe.daum.net/eduhow/4SbY/6993주소 복사

4학년 입니다.

교육청주관 영재원에 신청을 할까 무지

고민입니다.

아이가 지치지는 않을까도

,과제를 많이 내주지는 않을지

아이가 즐겁게 다닐지(지금 자기는 한번 가고 싶다고 하지만...)

경험자 계시면 들려주세요

참고할께요

우선은 아이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일이죠. 무엇보다 과제를 즐길줄 알아야 한다는 ...과학이던,수학이던지...예능이던지~ 아이가 원하면 응시를 권합니다. 엄마의 기대에 등떠밀려서 간다면 재미가 없으리라는 지극히 초보적인 생각...우선이랍니다. 교육내용은 상당히 수준있고 학교에서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는 창의력,문제 해결력을 배우고 과제를 수행하게 한답니다
2008. 11. 17. 16:43

어린이의 삶 --- 한미유치원.


 
 
 
 
 
  •  
     
    천만에요. 백가지가 있어요.  
     (No way, The Hundred is there.)    


                          로리스 말라구찌



    어린이는 
    백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린이는 가지고 있습니다.
    백 가지의 언어
    백 가지의 손
    백 가지의 생각
    백 가지의 생각하는 방법
    놀이하는 방법, 말하는 방법을.
    백 가지의, 항상 백 가지의
    귀 기울여 듣고
    감탄하고 사랑하는 방법
    노래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백 가지의 기쁨
    발견해 나갈 백 가지의 세상
    고안해 낼 백 가지의 세상
    꿈꾸는 백 가지의 세상을

    어린이는
    백 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 배 더 많이)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흔 아홉 가지를 훔쳐가 버립니다.
    학교와 문화는
    몸과 머리를 따로 떼어놓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에게 말합니다.
    손을 써서 생각하지 말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지 말라
    듣기만 하고 말은 하지 말라
    기쁨은 느끼지 말고 이해만 하라
    단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만
    사랑하고 감탄하도록 하라.
    사람들이 어린이에게 말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을 발견하도록 하라
    그리고 백 가지 세상 중에섯 아흔 아홉 가지는 훔쳐가 버립니다.
    사람들이 어린이에게 말합니다.
    작업과 놀이
    현실과 환상
    과학과 상상
    하늘과 땅
    논리와 꿈들은
    같이 섞여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어린이에게 말합니다.
    백 가지는 없어.
    어린이는 말합니다:

    천만에요. 백 가지가 있어요.

    2008. 9. 20. 22:48

    삼헌이를 위한 기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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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초



    자녀 >  귀헌  승헌  정헌     2006년 1월

    1.  앞으로도 밝고 건강하게 커가길
    2.  형제들 간에 우애가 깊고 사랑에 능한 사람으로 자라나길
    3.  일찌기 하나님을 바로 알고
        복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고 나누고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4.  받은 은사를 탁월하게 발전시켜서 지혜롭게 쓰임받고
         하나님과 이 세상에 다리를 놓는 주의 일꾼 되길


    *  아마도 나들목 영아부에서 정헌이 <가족 기도제목>을 보내 달라고 해서
      분주한 중에 계기 삼아 고민하고 정리했던 내용이다.
     
        귀헌이 8살 --입학을 앞두고,  승헌이 6살 -- 형아 없이 유치원에 다녀야 하는 시점
        정헌이 4살 --귀헌이의 입학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예고 되는 상황에서  
                          (등교지도, 학교급식봉사 등, 숙제지도)
                           어린이 집을 보내야 하는구나  괴로운 생각이 많았던 거 같다.



    <세아들 호성, 호준, 호윤> ---2008년 역시 세아들의 엄마인  두선자매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숲기도:

       세아들 모두 그 평생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복을 누리고, 그것을 나누는 삶이 되게해주세요.

      모태신앙으로 문화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인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끝없는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진짜  기독교인으로 성장잫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기도: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하셨는데 세아들이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평생의 든든한 친구가 되게 해주세요.

      늘 곁에 좋은 스승과 친구들로 메꾸어 주셔서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지으실때 계획하셨던 꿈이 성취되길 바라고 , 각 아이들마다 본인에게서 특별한 하나님의 꿈을 감지해 나가길 바랍니다


    --- 내용으로는 위의 내가 예전부터 하던 기도랑 상통하는데
         표현의 차이가 있는 데에서 뭔가 더 풍성하고 따라 하고 싶어져서 옮겨 붙인다.

    2008. 9. 6. 22:06

    나비박사 ---사진, 그림 없는 것 (6편)

    답변자 : maxman0319     l    2008-09-03 22:44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박사 석주명(石宙明, 1908. 11. 13 ~1950. 10. 6)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서, 13세인 1921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그는 1926년 3월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의 관문을 뚫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서 유학길에 올랐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년간 근무하면서 나비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는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는 채집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는데, 훗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국산 나비 분포도>는 생물지리학상 세계 학계의 유례가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이 새로운 종의 남발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석주명은 10년 연구 끝에 1940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석주명이 나비와 함께한 세월은 역사의 격동기였으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어딜 가나 생명보다 더 아끼던 지도 500장을 배낭에 넣어 메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50년 9월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나비 표본이 모두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나비를 쫓아 평생 산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그는 나비들의 뒤를 쫓아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간 것이다. 석주명!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 .

    -----------------------------------------------------------------------------------
     


    답변자 : emyc0428     l    2008-08-27 16:16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 박사 석주명(1908~1950)


    석주명(石宙明, 1908년 11월 13일 ~ 1950년 10월 6일)은 한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언어학자이다

    학창시절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이는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석주명이 민족문제과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같은 동물을 좋아해 짐승을 길렀으며, 1921년에 서울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겨 1926년에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는 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敎)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고,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는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재학시 지도교수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곤충에 관심이 많은 제자에게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며 나비 연구를 권했고, 석주명은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붙여준 나비이름으로는 지옥나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깊은산부전나비 등 다양하며, 학명에 그의 성(Seok)을 붙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석주명은 불행해지고 말았다.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국립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석주명 자신도 1950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죽었다. 죽기 직전에 석주명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저서
    《A synonynic List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나비 총목록)》, 1940
    《제주도 방언집》, 서울신문사, 1947
    《제주도 생명조사》, 서울신문사, 1948
    《제주도관계문헌집》, 1949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1949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 신양사, 1992
      김은미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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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나비박사석주명
    답변자 : ysh200531     l    2008-08-28 17:39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同種異名)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점



    산네발나비의 앉은 모습  흰무늬왕불나방의 앉은 모습 


    혹시~ 탱자나무 잎에서 애벌레를 본 적이 없나요.그 징그러운 몸에서 그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나온답니다. 나비와 나방은 비늘로 덮인 2쌍의날개를 갖고 있고 애벌레는 주로 식물의 잎을 먹기 때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나비는 낮나비와 밤나비로 불리기도 하는데 낮나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비로 주로 낮에 활동을 하며, 밤나비는 나방이라고 부르며 주로 밤에 불빛에 모여듭니다. 생김새로의 구분은 나비의 더듬이는 곤봉모양이며, 날개를 모아 세우고 앉으며, 몸이 비교적 가늘고 작지만 나방은 더듬이가 바늘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거나 빗살모양이고 날개를 활짝 펴서 앉으며 몸이 퉁퉁한 것이 많지요. 또한 나방은 잡으면 비늘가루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비는 요...... 1. 주로 낮에 활동하며 날개 색이 곱고 화려하다. 2. 더듬이- 끝이 곤봉 모양으로 부풀어 있다. 3. 대부분 날개에 비해 몸이 가늘고 쉴 때도 날개를 펴거나 위로 접을 때가 많 다. 4.1만종정도
     나방은 요....... 1. 대부분 밤에 활동을 하고 날개의 색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어두운 편이다. 2. 더듬이- 실 모양, 톱니 모양 또는 깃털 모양으로 다양하다. 3. 몸이 크고 날개를 겹쳐서 앉는 경우가 많다. 4.18만종 5.주로 밤에 활동하고 수평으로 날개를 편 채 쉰다. 6.날기 전에 몸을 흔들어서 열을 내서 체온을 높인 뒤 난다.
    답변참고 >> 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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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나비박사 석주명
    조언자 : beblbc     l    2008-09-03 21:53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몰라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될지... 일단 올려드립니다

    지역성’살린 연구로 ‘조선적 생물학’개척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조언참고 >> 소년조선일보

      이병철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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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hanho0605     l    2008-09-04 00:52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일명 나비학자로 불리는 석주명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야후에서 검색하고
    야후꾸러기에서 관련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석주명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있는 곤충들을 연구하신 그런 곤충학자로 유명하신 분 입니다.
    아래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석주명 곤충학자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출생지 : 평남 평양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석주명 - 야후!꾸러기 [현재창]
    업적, 학문, 생애 소개 학습자료 모음.
    kr.kdir.yahoo.com/directory/... /history/biographies/suk_jumoung (17k)
      한종호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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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비공개    l    2008-09-05 19:40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석주명 곤충학자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출생지 : 평남 평양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출처 : 야후! 통합검색
     



     

    2008. 9. 6. 21:47

    귀헌이의 과제 <석주명 박사> (6편)

    답변자 : maxman0319     l    2008-09-03 22:44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박사 석주명(石宙明, 1908. 11. 13 ~1950. 10. 6)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서, 13세인 1921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그는 1926년 3월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의 관문을 뚫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서 유학길에 올랐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년간 근무하면서 나비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는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는 채집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는데, 훗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국산 나비 분포도>는 생물지리학상 세계 학계의 유례가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이 새로운 종의 남발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석주명은 10년 연구 끝에 1940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석주명이 나비와 함께한 세월은 역사의 격동기였으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어딜 가나 생명보다 더 아끼던 지도 500장을 배낭에 넣어 메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50년 9월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나비 표본이 모두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나비를 쫓아 평생 산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그는 나비들의 뒤를 쫓아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간 것이다. 석주명!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 .




    답변자 : emyc0428     l    2008-08-27 16:16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나비 박사 석주명(1908~1950)


    석주명(石宙明, 1908년 11월 13일 ~ 1950년 10월 6일)은 한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언어학자이다

    학창시절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이는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석주명이 민족문제과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같은 동물을 좋아해 짐승을 길렀으며, 1921년에 서울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겨 1926년에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는 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敎)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고,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는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재학시 지도교수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곤충에 관심이 많은 제자에게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며 나비 연구를 권했고, 석주명은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붙여준 나비이름으로는 지옥나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깊은산부전나비 등 다양하며, 학명에 그의 성(Seok)을 붙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석주명은 불행해지고 말았다.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국립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석주명 자신도 1950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죽었다. 죽기 직전에 석주명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저서
    《A synonynic List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나비 총목록)》, 1940
    《제주도 방언집》, 서울신문사, 1947
    《제주도 생명조사》, 서울신문사, 1948
    《제주도관계문헌집》, 1949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1949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 신양사, 1992

      김은미 님의 글입니다.



    A : 나비박사석주명
    답변자 : ysh200531     l    2008-08-28 17:39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同種異名)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점

    산네발나비의 앉은 모습
    흰무늬왕불나방의 앉은 모습
    혹시~ 탱자나무 잎에서 애벌레를 본 적이 없나요.그 징그러운 몸에서 그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나온답니다. 나비와 나방은 비늘로 덮인 2쌍의날개를 갖고 있고 애벌레는 주로 식물의 잎을 먹기 때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나비는 낮나비와 밤나비로 불리기도 하는데 낮나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비로 주로 낮에 활동을 하며, 밤나비는 나방이라고 부르며 주로 밤에 불빛에 모여듭니다. 생김새로의 구분은 나비의 더듬이는 곤봉모양이며, 날개를 모아 세우고 앉으며, 몸이 비교적 가늘고 작지만 나방은 더듬이가 바늘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거나 빗살모양이고 날개를 활짝 펴서 앉으며 몸이 퉁퉁한 것이 많지요. 또한 나방은 잡으면 비늘가루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비는 요...... 1. 주로 낮에 활동하며 날개 색이 곱고 화려하다. 2. 더듬이- 끝이 곤봉 모양으로 부풀어 있다. 3. 대부분 날개에 비해 몸이 가늘고 쉴 때도 날개를 펴거나 위로 접을 때가 많 다. 4.1만종정도
    나방은 요....... 1. 대부분 밤에 활동을 하고 날개의 색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어두운 편이다. 2. 더듬이- 실 모양, 톱니 모양 또는 깃털 모양으로 다양하다. 3. 몸이 크고 날개를 겹쳐서 앉는 경우가 많다. 4.18만종 5.주로 밤에 활동하고 수평으로 날개를 편 채 쉰다. 6.날기 전에 몸을 흔들어서 열을 내서 체온을 높인 뒤 난다.
    답변참고 >> 네이버 지식


    A : 나비박사 석주명
    조언자 : beblbc     l    2008-09-03 21:53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몰라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될지... 일단 올려드립니다

    지역성’살린 연구로 ‘조선적 생물학’개척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유명한 석주명(1908.11.13∼1950.10.6)이란 나비학자가 계셨는데요 석주명 선생님은 75만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었고, 약 250종의 나비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을 밝혀냈답니다.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다.
    1908년 평안 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나비에 관한 책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세계적인 나비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채집 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 전국에 있는 나비들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셨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광복 후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실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걸으며 땅콩을 드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깨며 연구에 몰두하신 석주명 선생님은, 세게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나비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석주명 선생님이 최초로 이름 붙인 나비는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입니다.


    조선의 나비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람들과 친숙하기 때문에 많은 곤충학자들은 나비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곤 한다. 조선의 나비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 역시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석주명이 본격적으로 나비연구에 뛰어든 1930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조선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로서, 적은 수의 표본에 근거한 결과들이 많았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각지를 다니며 채집과 조사를 수행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이 적은 수의 개체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개체변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다양하고 연속적인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힘으로써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연구방식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다른 분류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 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 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당시 학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나비연구로 조선적 생물학의 개척
    근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후진 국가의 과학자는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는 선진 지역과 경쟁이 힘들지만, 그 나라의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석주명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고, 식민지의 일개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나비 분류학을 ‘조선적 생물학’이라고 부르면서 외국 학자들의 연구와는 구별을 지으려 했다.
    조언참고 >> 소년조선일보

      이병철 님의 글입니다.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hanho0605     l    2008-09-04 00:52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일명 나비학자로 불리는 석주명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야후에서 검색하고
    야후꾸러기에서 관련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석주명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있는 곤충들을 연구하신 그런 곤충학자로 유명하신 분 입니다.
    아래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석주명 곤충학자
    •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 출생지 : 평남 평양
    •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석주명 - 야후!꾸러기 [현재창]
      업적, 학문, 생애 소개 학습자료 모음.
      kr.kdir.yahoo.com/directory/... /history/biographies/suk_jumoung (17k)

      한종호 님의 글입니다.

          
    A : 석주명에 대하여
    답변자 : 비공개    l    2008-09-05 19:40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 석주명 곤충학자
    •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 출생지 : 평남 평양
    •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석주명 石宙明
      [1908~1950]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출처 : 야후! 통합검색

    2008. 8. 30. 16:47

    승헌이의 첫 자작 시화 2008. 8.30



                                  펭귄

                                                          조승헌


    펭귄이 뒤뚱뒤뚱
    걸어서 물 속으로 풍덩

    이긴 펭귄도 풍덩
    엄마펭귄 아기펭귄도 같이 풍덩.



    * 후기 :
    "승헌아, 여러 가지 쓸 거리 중에서 어떻게 펭귄을 쓸 생각을 했어?"
                  "그냥~. " ---예상했던 대답 1번.^^;
                  "오늘(토) 교실에서 펭귄 영화 봤니?"
                  "아니, 여러 동물들을 생각하고 지어 봤는데 펭귄이 젤로 쓸게 맘에 들었어요."

    비록 여전히 맞춤법이 맘대로 잘 안 되지만 별로 기죽지 않고
    큼직하게 줄맞춰 깨끗하게 쓰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림이 재미있는데, 나중에 찍어서 올려야겠다.
    승헌아, 너의 감성은 매력있단다. 참 잘 썼어요. ^^
    2008. 8. 29. 13:14

    예방접종 要 choice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 아이를 모유수유했다. 쉽지 않았는데 여건은 쉬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평생에 그렇게 일관성을 지키고 "참 잘했지!" 싶은 것이 별로 없는데 모유수유는
    내게 육아에서 빛나는 상이다. 결코 내 노력이 남다르고 내가 잘나서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랑은 아니고 그냥 감사하다는 것이다.
    세 아이를 첫 수유할 때부터 젖몸살의 위기가 있는 출산후 1.2달에 나름 지침사항이라는 게 있다. 생고생이나, 무지에서 오는 미지의 두려움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열심히 듣고 따라했었다. 그런데, 첫째 아이부터 셋째까지 그 때마다 꽤나 중요한 지침이 달랐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해 봐야겠다. 암튼 그래서 주변에 애기 낳고 수유하는 엄마들 한테 열심히 전도하듯이 전수해 주었는데...
    그렇게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전하는 정보가 많다. 그런데, 사람의 건강과 생명에 상관되는 정보가 틀린 거였다면, 더구나 갓난 아기 또는 유아들처럼 철저히 부모의 보호와 선택에 그 삶이 맡겨져 있는 대상들의 실상이라면 문제가 넘 심각하다.

    나는 몰라서 예방접종 다 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선택할 수 있다면 잘못된 주류를 거슬를 수는 있을까?
    다른 영역이면 혹 모험이라도 기꺼울 텐데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다니, 오히려 주저 되는 건 웬말인가?
    여름이네의 단호한 선택과 선두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지켜보는 나에게 도전과 격려가 되어서 든든하고 고마운 나눔이 된다.
    백신이나, 의학적 처치가 현재만큼 발전하는데는 믿을 수없을 만큼 단 시간에 이루어졌고, 불과 5.60년 전만 해도 얼마나 미개하고 대책이 미궁이었는지 또 그 이전의 의학역사가 생명 앞에 얼마나 엽기적이었는지 생각하면, 그저 놀랄 수 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인권을 존중하는 양심의 목소리는 이 세대의 주류와 계속 역류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나의 육신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나의 영혼이 잠잠히 그 진실함에 순종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길
    간절히 원한다.

    다음 글은 여름이네에서 퍼 온 글이다.
    임신 계획이 있거나 출산을 준비 중인 또는 육아중인 부모들 그리고, 그 지인들이 필독하면 좋겠다.


     

    20080613 아빠가 나무로 직접 만들어준 구르마를 타고 신났어요
     (들꽃님의 아들 여름군. 시골에서 예방접종 없이 무럭무럭 크고 있음.
    당시월령 : 만 10개월 반 정도)



    <들꽃처럼>에서 퍼온 글http://cosmoslike.net

    예방접종은 기본이지??

    2007/07/10 17:23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으면서 수 많은 선택 앞에 놓여진 나를 보게 된다.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부터(사실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먹거리는 요즘 아이들의 최대 이슈라 할 수 있는 아토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을지, 모유를 먹일지 분유를 먹일지, 모유를 먹인다면 언제까지 먹일지...

    가장 어려운 선택 가운데 하나는 예방접종 문제인 것 같다.
    아마 '의식있는 선배 엄마'의 조언이 없었다면..
    나 역시, 여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매달 예방접종 기준표에 따라 주사를 맞췄을 것이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공부한 후 내린 나의 결론은
    - 아이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모유수유'를 최소 2년 이상 하자.
    - 최대한 화학적이고, 인공적인 것 (의약품, 먹거리, 화장품, 생활터전, 전자파..)은 피하자.
    - 예방접종은 가능한 하지 말자.

    아래 내용은 사이트와 책을 읽으며, 꼭 필요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당연한 줄 알았던 '예방접종'의 감춰진 이야기들
    - 백신에는 수은(치메로살), 알루미늄, 페놀, 포르말린 등 독성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 아토피, 유아돌연사, 발달장애, 자폐증 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 각 백신은 예방하려던 그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
    - 영양과 보건 상태가 좋아지면서, 20세기 초반부터 전염병(홍역, 백일해, 디프테리아 등)이 급격히 감소해왔으나, 최근 예방접종 비율이 높아지면서 도리어 발병률이 높아지고 있다.
    - 백신으로 예방하려는 대부분 병은 우리나라에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10만 명 중에 한두 사람이 걸릴까 말까 하거나, 걸려도 너무나 쉽게 합병증 없이 치료되는 질병이다. 현재 백신이 필요한 질병은 암, 에이즈, 사스 와 같은 병일 것이다.
    - 백신 개발과 판매(국가필수예방접종으로 지정)는 거대 제약회사의 수익과 직결되어 있다.

    꼭 예방접종을 해야한다면?
    -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플때는 백신 접종하지 말것.
    - 한번에 여러가지 백신을 접종하거나, 혼합백신 접종하지 말것.
    - 8촌 이내 발달장애, 자폐있을경우 백신 접종하지 말것.
    - 접종 후, 부작용을 유심히 관찰하라.


    우리나라 국가필수예방접종과 그 위험성
    - B형 간염 - 유아돌연사와의 연관성. 출생직후 접종
    - DTaP 백신(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 현재 거의 발병하지 않고, 발병한다해도 쉽게 치료가능
    - 소아마비백신 - 원숭이 조직이용해서 만듦. 에이즈와의 연관성 (1957년 아프리카 브룬디, 콩고, 르완다 아동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된 경구용 소아마비 백신접종 / 현재 에이즈의 중심지)
    - MMR 백신(홍역, 볼거리, 풍진) - 발병한다해도 치료 가능 / 풍진의 경우, 최소 임신 3개월전 검사 후 풍진백신만 접종 가능.
    - 수두백신 - 아동기 수두는 줄었으나, 성인기로 옮겨져 합병증이 많아짐.
    - 일본뇌염 - 치메살로(수은) 포함, 일본에는 백신접종 권장 중지(2005년)
    - 결핵(BCG) - 예방주사를 맞아도, 성인이 되어 결핵 걸리는 사례가 많다.
    ** Hib 뇌수막염 백신 - 자폐증과의 연관성
    ** 독감 백신 - 치메살로(수은) 포함 (** 필수는 아니지만, 국가가 적극 권장하는 예방접종)


    # 참고 사이트 :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  -> 바로가기 
    간호학을 전공하고, 병원 보건소에서 일하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의 대표 차혜경씨의 아이는 DTaP 예방접종 후 아토피와 경련을 시작했고, 그 후 MMR 예방접종 후 발달장애를 겪게 되었다. 엄마로써 절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책을 번역했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와 최근 정보를 잘 정리해 놓았다. 백신의 무효과성을 증명하는 각종 자료가 있다. 책 읽는 것보다 쉽고, 더 현실적이다.

    '아플 때'는 쉬어야 한다는 '상식',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세균'을 주사로 몸에 집어넣는 행위가 안 좋을 것이라는 '상식',
    세상 모든 사람들은 똑같지 않다는 상식,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상식'
    상식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 참고 서적
    1.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
    / 스테파니 케이브 지음 / 바람 펴냄 /
    가정의학전문의로 자폐를 치료하고 연구하다가, 예방접종과의 관련성을 찾게 되고, 예방접종에 대해 숨겨진 이야기를 책으로 쓰게 된다. 예방접종의 부작용과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자세히 적혀있으며, 옮긴이가 덧붙인 한국에서의 예방접종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다.

    2. 예방접종 부모의 딜레마 / 그레그 버티 지음 / 잉걸 펴냄 /
    필자는 첫 아이가 예방접종을 받은 후 부작용을 겪으면서, 예방접종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그 이후 태어난 6남매에게는 예방접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보육시설에서 받아주지 않는 등 불의익을 받게 된다. 엄청난 재력으로 힘으로 위협하는 제약회사, 의사들에게 대항한 전쟁을 시작했다. 예방접종의 위험성보다는 이익이라고 단정되는 것들에 대해 논의를 집중하고 있다.

    3. 백신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 / 팀 오시 / 여문각 펴냄
    아직 못 읽어 본 책. 미국식 예방접종 시행에 관한 것으로 백신의 역사와 면역체계, 백신의 부작용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2008. 8. 25. 14:57

    연변에 간 남편 그리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6.11.

    이번이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인가
    남편은 <북한 비전트립팀3기>와 함께 지금 중국 연변에 갔다.

    좀 지난 남편의 현북한상황 자료글을 대하며,
    아이들과 같이 생각 좀 해 보려고
    그리고 ,미루면 안 되는데 미루고 만 <북한돕기> 허니즈 프로젝트를 타진(조장)하려고
    동영상 한 편도 보고 짧은 시간을 집중했다.
     
    승헌이는,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살면 되잖아요?" 급하게 앞서는 마음을 표한다.

    북한이나 난민들, 전쟁에 대해서 때마다 얘기하지만
    글쎄... 내 마음이 급하게 앞서서 열변을 토하지만
    아이들에게 그 고민과 사명감이 어떻게 뿌리 내릴지
    기대하면서도 전하는 내 태도가 엄마이기때문에
    더 영향이 순적할 지, 왜곡될 지 알 수가 없다.
    때로는 벌써 조바심을 내는 나를 본다.

    내가 잘 못하면서
    대리만족을 얻듯
    다만 이것이 선한 것이니 당연히 해라 강하게 권하고 있지 않은지?
    아이들은 곧이 곧대로 동의할 수도 있지만
    그저 엄마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자의가 없이
    감동도 없이  또하나의  편협한 길을
    오만한 길을 가게 되는 게 아닐까?

    좁은 길로 가려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사랑깊은 사연으로 만지셔서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그 길에서 소망을 붙잡고
    자족을 배우며
    순전한 십자가를 추구할 수 있는데......

    그리고, 아이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하는
    화가 났을 때 또는 수시로 단호하게 하는 '잔소리'가 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배워서 남주게!
    배울 줄 알아야 다른이를 돕는
    겸손한 리더가 되고
    그래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부자가 되는 거 좋다.
    단, 지혜로운 부자가 되어야 복이 있는 거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주시는 지혜로 돈을 다스릴 줄 알아야
    돈이 제대로 흘러가게 퍼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센 힘을 주시는 건
    힘 약한 자를 보살피고 도우라고 부어 주신 거고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더 많은 돈을 채우신 건
    돈없어 괴로운 자에게 마음을 줄 때 돈도 주라고 허락하셨다.  

    복이 많다는 것은
    받은 것을 퍼 주고 내 안에서 흘러 가게 할 수 있는
    갖은 자의 특권인 것이다.


    북한을 생각하면,
    그리고 대한민국이(사실 국제적 입지가 실감이 안 난다) 이제 제대로 지구촌 시민의식으로 정체성을 갖어야 하는 당위 앞에서,
    어떻게 장기적 안목의 큰 그림을 그리고 비전을 바라봐야 할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바가 묵직하게 거룩한 부담을 일깨운다.

    남편이 중국에 가기전에 한 자매가 기도 제목을 물어 보았더니
    나와 세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
    먼 길 떠나면서 남아있는 식솔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말의 뉘앙스가 현재의 나를 자조하게도 하고, ---물론 그 사랑과 배려에 고맙지만
    내 영적 싸움의 현장은 가정이 기본이고 핵심이라는 사실이 눈 앞에 꽉차 오른다.
    평상시에 인내하며 잘 하고 있었다면
    자조는 빼고 순수히 격려로 받고 흐뭇했을 텐데
    늘 위로와 인정을 바라는 유약한 나를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럽다.
     
    첫째 아이는 --- 이제 성적이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어릴 때 부터 집중력이 남다른 부분이 강점이고
    둘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수지타산에 빠르고 ---더구나 관계의 흐름에 민감하고 주도적이다
    성취욕이 두드런진 것이 강점이다.
    셋째는 ... 잘 모르겠는데 연예인이 될거 아니, 되겠다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세 아이의 강점이 두루두루 조금씩 나타나고
    큰 차이가 없는 듯 하지만 묘하게 다르긴 또 다르다.

    (워낙 엄마라는 사람이 통제가 많은 애정외출중 사감형이라서
    아이들이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잠복된 스트레스도 많고
    좀 경쟁적이다.)

    비록 나의 양육태도나 늘 과다노출된 나의 죄성 문제 앞에서 위축되지만
    남편의 사역을 빌어서 우리 가정은 은혜롭게도 최전선을 상기할수 밖에 없으니
    또 우리 공동체가 건강한 꿈을 공유하고,
    힘있는 메세지로 늘 격려받고 서로 세워 주니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심은 분명하다.

    현재 내 삶의 주어진 최강점중 분명한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세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
    최강점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동전의 양면임을 늘 생각한다.

    아이들은 내가 강조하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이라크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를 위해 가끔 기도를 한다. 특히 식기도시~.
    북한의 상황을 더 알게 해 주고
    밥 먹을 때 나간 식구 생각하며 밥 한공기 먼저 퍼 놓던 옛시절의 미덕처럼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하고,
    삼형제의 <북한돕기>작전을 시작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작은손이 드리는 마음과 깨어나는 순진한 아이들의 소망을 이끄시고
    가장 귀한 것으로 드려야 할 삶을 연습시키시고
    예수님 사랑에 능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자녀로 자라게 하셔서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나라에 다리를 놓는 일꾼 삼아 주시길 기도한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에서
    말씀으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깊어지는 깨달음이
    내 안에 위안과 지적 충족으로 그치질 않길 간절히 바란다.
    몸으로 떠나 있는 지체들의 영적 싸움과 살아있는 비전이
    내 삶에 녹아지고 내 아이들의 드려질 삶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가정교회와 공동체에서 뛰는 심장의 작은 실핏줄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길 바란다.

    남편이 떠난 여행은, 때되면 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지난 봄부터 시작된 '비전트립'이라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시간이 현지에 다녀오고 또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통일의 꿈으로 여물어 갈 것을 기대하게 된다. 슬픔과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공동체 의식을 확장해서 통일 비전트립팀과 함께 마음을 보냈다. 그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하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할 줄 믿는다. 모두 건강히 성령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소망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고듣고 깊게 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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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6. 27.